확신하건대 이안(李安, Ang Lee)의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3D영화의 모범 사례로 세계영화사에 등재될 것이다. 3D. 소위 ‘입체영화’라는 자극.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아바타(Avatar)>가 테크놀로지의 신기원을 연 이래, 허겁지겁 줄지어 양산된 3D영화들은 <아바타>의 후광을 등에 업은 졸작의 연속이었다. 이 영화들은 관객의 눈에 과포화된 이미지를 퍼붓는 것이 입체감을 강화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나태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자극이란 얼마나 일시적인가? 하나의 자극이 충족되면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상 그러한 자극은 쉽게 익숙해지고 충족감은 금방 소멸하기 마련이다. 느닷없이 앞으로 돌출해 관객에게 난폭하게 이미지를 퍼붓는 영화들은 아주 오래 전 서울랜드의 과학체험관에서 보았던 3D영화들, 예컨대 관객의 눈을 후벼 파듯 카메라를 향해 집요하게 근접하는 우산 꼬챙이를 피해 몸을 비비 틀어대던 불편한 경험을 떠오르게 한다. 현실감, 입체감에 대한 오해이거나 과장에 불과한 이러한 체험을 3D의 전부로 착각한 제작자들의 손에서 3D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은 일찌감치 사망선고를 받은 게 아니었을까?
정작 3D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은 오락적 기능을 극대화한 3D영화들이 실패한 곳에서 소위 ‘작가’ 감독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모색되어 왔다.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피나(Pina)>와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 감독의 <잊혀진 꿈의 동굴(Cave of Forgotten Dreams)>은 3D라는 도구가 새로운 시각체험에 대한 예술가의 표현 욕망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피나>의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의 아름다움, 그리고 마치 3만 년 전 동굴 속에 들어가 원시 시대의 영혼과 접촉하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선사하는 <잊혀진 꿈의 동굴>은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촬영하는 대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써 3D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한다. 그리고 드디어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에 이르러 우리는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을 찾으려는 예술가의 탐구가 행복한 결실을 맺게 된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 3D 영화의 존재 이유에 대한 증명! 기존의 3D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이안’ 감독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머뭇거리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18,000원이라는 고가의 관람료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머릿속에 없었다. 이미 이 영화에 대해서는 많은 글들이 나와 있으니 이 영화가 어떻게 기존의 3D영화와 차별화되고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를 진정한 최초의 3D 영화라 할 수 있을지는 다른 이들의 글을 읽어 보면 되겠다. 그 이상 내가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그저 영화가 끝난 후까지도 내가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속절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내가 이 영화를 받아들인 방식 혹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영화 초반에 어쩌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을 한 장면이 등장한다. 소설가에게 주인공 파이 파텔이 자신의 삼촌과 관련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물을 무서워하는 파텔에게 삼촌은 “너를 죽이는 것은 물이 아니라 공포심”이라고 말하면서 어린 파텔을 수영장 물속으로 집어던진다. 물속에 가라앉는 파이 파텔의 모습을 느리게 잡아주는 이 인상적인 수중 장면에서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사건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복선을 발견한다. 살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것은 ‘물’이라는 외부의 물질이 아니라 ‘공포심’이라는 내적 심리라는 것. 이것은 가족을 잃은 파텔이 망망대해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 가는 과정에서 그가 진실로 싸워야 하는 대상이 폭풍 같은 재난이 아니라 여차하면 놓아버릴지 모를 삶에 대한 애착과 의지, 수시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와 고독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3D영화와 달리 이 영화가 3D에 집중적으로 공들인 부분이 액티브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 자칫 죽음의 유혹에 빠져들 것만 같은 주인공의 절대적 고립감과 두려움을 표현한 정적인 장면이라는 점은 이 영화가 3D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의 내면 심리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가 정말 파텔과 함께 구명정에서 227일간 동거한 물리적 존재였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영화의 원작이 된 얀 마텔(Yann Martel)의 소설에는 “호랑이는 배에 없었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리처드 파커는 실제 호랑이가 아니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파텔이라는 인간의 의식 위로 사납게 튀어나온 길들여지지 않은 그의 무의식, 야성, 폭력적인 본능의 상징, 혹은 은유인 셈이다.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순수하게 즐겼듯이 사나운 맹수와 사투를 벌이며 227일 간 망망대해에서 호랑이와 공존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액션영화, 혹은 재난영화이지만 동시에, 액션, 재난영화라는 장르의 거푸집 속에 인간의 이성과 야성,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투쟁, 그리고 그 속에서 무의식과 본능을 길들이고 지배하며 성장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찾아낸 ‘내 안의 호랑이’라는 우화는 이 영화의 결을 한층 다층적이고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이 영화를 순수하게 액션 어드벤처물이나 재난영화로 보든, 인간 실존에 대한 우화(寓話)로 보든 영화를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관객층을 아우르면서 자기 나이 대에 맞는 해석과 공감을 유도하는 영리한 영화다.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으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다.

개인적으로 감독과 원작자가 찾아낸 ‘내 안에서 튀어나온 호랑이’라는 알레고리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주인공 파텔이 오랜 표류에서 벗어난 순간 리처드 파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문명과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귀환했을 때 사라져 버린 원초적 본능, 공격성.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호랑이를 보며 서운했다는 주인공의 사후 고백은 문명과 이성이 억누르고 포기한 원초적 에너지, 본능에 대한 인간의 양가감정일 것이다. 그것은 제압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실의 흔적은 너무 깊다. 삶이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무엇을 버려야 하는 일련의 행위다. 우리는 그것을 질서, 문명, 이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상실 앞에서 인간은 그 속절없는 결락감을 어떻게 치유하고 메워 가는가? 이 영화가 철학의 경지까지 나아가는 것은 이러한 인간 실존의 조건을 종교적 차원의 명상으로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속절없이 흘렸던 나의 눈물은 가파른 절벽 같은 이 세계에서 인간적 품위를 위해, 혹은 그저 인간으로 남기 위해 억누르고 어르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실존의 고민에 깊이 감응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욕망에 굴복하고 때로는 욕망을 다스리며 그렇게 버리고 비우며 채워가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