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역시 끝까지 믿고 따르는 남편이 없었다면 끝까지 버티진 못했을 거다. 프랑스에는 이런 말이 있다. 위대한 사람 옆에는 훌륭한 부인이 있다고. 아웅 산 수 치(Aung San Suu Kyi)의 경우는 성별이 반대지만." <더 레이디The Lady>를 들고 작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뤽 베송(Luc Besson) 감독의 말보다 더 정확하게 이 영화를 설명할 표현이 있을까. 감독 스스로 본의 아니게 지적한 대로 이 영화의 제목은 부정확하다. 상영시간 내내 카메라의 포커스는 레이디보다 젠틀맨에 맞춰져있다. 그 젠틀맨은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영국인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Michael Aris, 1946~1999) 박사다. 그는 영화 전체를 열고 닫는 문지기이자, 아웅산 수치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책략가이며, 그녀의 특수한 이야기를 보편적 이야기로 번안하는 각색가이다. 관객은 그를 통해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아웅산 수치의 행적에 박진감을 느끼며, 그녀의 이야기에 동감하게 된다.

프롤로그와 타이틀 시퀀스를 지나 영화는 런던의 한 병원에서 시작한다. 에어리스^{데이비드 듈리스(David Thewlis) 분}는 막 5개월에서 5년 사이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쓸쓸하게 식탁을 바라본다. 카메라가 그의 등 너머로 움직이면 그곳에는 아웅 산 수 치^{량즈충(楊紫瓊) 분}가 식탁을 책상 삼아 아웅 산(Aung San, 1915~1947) 장군과 버마에 관한 글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감독이 그녀의 삶에서 잘라낸 1988년부터 1999년까지 12년의 시작에 해당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불을 밝히는 것은 에어리스의 시선이다. 한편 그 끝을 장식하는 이도 에어리스다. 마지막 15분 동안 아웅 산 수 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에어리스와의 마지막 만날 기회를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끝내 남편의 죽음을 라디오로 들을 수밖에 없다. 비통한 심정의 그녀는 아기처럼 웅크린 자세로 바닥에 누워 운다. 마치 남편의 죽음이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하리라는 암시적 제스처라도 되는 것 마냥 그녀를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가 자리한다. 에어리스의 죽음은 아웅 산 수 치의 삶에서 임의적으로 선택된 편집점이 아니다.

감독의 욕망이 아웅 산 수 치가 아닌 에어리스의 역할에 더 가까이 닿아있었다는 증거는 12년이라는 시간 중 선택된 순간들의 면면에도 서려있다. 에어리스는 민족민주동맹(NLD) 결성 기념사진을 촬영할 때 사진사 옆에 서서 그녀가 어디에 서야 할지 알려주며, 런던으로 강제 송환 당한 후에도 그녀가 소수민족들을 방문해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동안 교차편집을 통해 그녀에게 밥을 챙겨 먹이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리며, 그녀의 단식투쟁을 멈추기 위해 버마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쉬지 않고 국제사회에 협조를 요청한다. 그 순간들은 그녀의 혁명이 아닌 그의 헌신을 강조한다. 그녀의 혁명은 정체 상태로 전시될 뿐이지만 그의 헌신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진다. 말하자면 서로 한 치도 물러날 수 없는 이 현실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여왕을 대신해 진짜 움직이고 있는 말은 에이리스다. 발이 묶인 그녀가 버마의 정치적 상태에 대한 상징이라면, 그 상징이 세계 정치 무대에서 기능하도록 하는 배후의 협상가가 에이리스인 것이다.

급기야 이런 질문이 고개를 든다. 에어리스가 없었다면? 아마 뤽 베송의 <더 레이디>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아웅 산 수 치가 (가족과 조국 중) 조국을 선택한 뒤 어떻게 버텨내는가가 흥미로워서” 감독을 수락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어떻게’를 ‘흥미로움’으로 이끈 연결고리가 에어리스였던 듯하다. 에어리스에 집중할수록 그녀의 ‘선택’을 복합적으로 풀이해야 하는 어려움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떻게’라는 질문은 아웅 산 수 치로부터 에어리스에게로 넘겨진다. 오래전 조국을 떠났던 여인이 ‘어떻게’ 조국을 위해 가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한 번도 대중 앞에 서 본 적 없는 여인이 ‘어떻게’ 국민의 대변자로서 정치 무대에 오르기로 결심했는지,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살아온 여인이 ‘어떻게’ 그만한 부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 와 같은 질문은 누락되어 있다. 고뇌의 시간이 그녀가 아닌 그에게 할당되면서 이야기는 보편적 가족드라마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혹 이 영화에 눈물 흘렸다면 바로 그 가족드라마에 감동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이란 보이지 않는 손이 되길 욕망하는 ‘더 젠틀맨’ 혹은 ‘더 허즈번드’의 무의식의 발로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기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