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수직력의 치열한 긴장 속에서 봄날의 씨앗은 싹을 틔운다. ‘암컷 수컷 모여 뜨겁게 부벼 대니’ 새 생명도 잉태된다. 누가 감히 갈등없는 생명 탄생을 말할 수 있을까. 생명의 평형과 조화를 향한 창조적이고 몽롱하며 나른한 갈등의 시기. 우리에게 봄날은 이렇게 기억된다. 인천시립극단의 한국명작시리즈 첫번째 작품 <봄날> 또한 한 폭의 풍경화 속에서 펼쳐지는 갈등과 화해의 여정을 환각처럼 그려내며 오감으로 봄날을 기억하게 한다.

사각의 프레임으로 설계된 무대는 그 자체로 커다란 액자다. 액자 속 세계는 ‘삶의 한 단면(slice of life)’을 그려야 한다는 자연주의자들의 슬로건 대신 동양적 정신세계의 넉넉함으로 채워져 있다. 황토색 질감의 둥글고 아담한 무대, 경쟁하듯 싹을 틔우는 나무와 꽃들, 알록달록한 봄날의 산천. 그야말로 동화 같은 한 폭의 파스텔화다. 그러나 그 속에도 모종의 공포와 역동성이 존재한다. 거대한 산맥처럼 똬리를 튼 구렁이가 위협적 형상으로 무대를 압도하고 있는 까닭이다. 구렁이는 두려움과 분노의 대상, 즉 아비의 존재를 형상한다. 그렇다면 공연에서 아비는 왜 구렁이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일까?

아비와 자식들 사이의 갈등은 공연의 큰 축을 형성한다. 자식들은 아비의 인색함을, 아비는 자식들의 조급함을 서로 탓한다. “이 세상에 있는 건 몽땅 다 아버지 것”이다. 아비의 것에 ‘손을 댄’ 세 명의 어머니들은 쫓겨나거나 목을 맸다. 자식들에게 아비의 존재는 봄날 햇볕 쬐러 나온 돌담 위의 구렁이처럼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다. “저 놈의 구렁이, 딱 때려잡았으면”하는 차남의 대사는 이렇게 아비를 겨냥한다. 한편으로 구렁이는 회춘을 위해 백운사 스님들이 맡기고 간 동녀(童女)를 품는 아비의 성적 욕망을 암시하기도 한다. 혈기왕성한 젊은 자식들은 훨훨 타오르는 산불을 바라보며 봄날의 밤을 지새운다. 꽃가루 날리는 봄철이면 천식을 앓는 막내는 피를 토하며 동녀를 그리워한다. 사춘기 소년의 열병이자 아비에 대한 원망이다.

이처럼 아비와 자식들의 갈등은 늙음과 젊음, 죽음과 생명, 겨울과 봄이 빚어내는 자연의 역동성과 긴장감을 강력하게 상징한다. 어미대신 어린 동생들을 키워낸 장남은 아비와 자식들의 갈등을 중재하며 잃어버린 모성과 생명의 회복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봄날의 나른함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자식들을 하나같이 의지박약형의 게으른 인물로 만들어 아쉽다. 이는 갈등의 동기와 힘을 약화시켜 공연의 긴장감을 떨어뜨렸다. 특히 아비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행동적 캐릭터로의 변화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압도하던 구렁이의 꼬리에 꽃잎이 맺히고 새 순이 돋아나는 순간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늙음에서 젊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갈등에서 조화로, 무대는 완벽하게 균형잡힌 봄날의 풍경화를 완성한다. 아비는 자신의 늙음을 받아들이고, 막내는 동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자연성의 회복, 그것은 곧 갈등의 해결이자 화해에 다름 아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자식들은 액자틀 밖에 일렬로 서서 조급함과 인색함으로 갈등을 겪었던 그 봄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아비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송한다. 모든 일들은 그 봄날, 한 폭의 풍경화 속에서 벌어진 꿈같은 일이었다고.

별 사건없이 제각각 2007년을 암중모색하고 있던 지난 봄, 인천시립극단의 <봄날>은 이렇게 ‘여백으로 가득 찬’ 공연을 보여주었다. 이런 자신감이 공연 마케팅에도 반영된 것인지 ‘공연 관람료 후불제’라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내세웠다. 한국 연극계의 관습으로 보자면 거의 공연사고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예술의 공공성과 공공극단의 대국민 서비스, 지역극단의 관객개발 차원에서 보자면 오히려 당연한 선택이다. 실험성과 당위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 앞으로 있을 인천시립극단의 공연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