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예술 서적들이 쌓여있고 하얀색 튤립이 화병에 꽂혀있다. 이곳에서 점잖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두 부부가 꽃을 집어던지고 가방을 뒤엎으며 아이들처럼 싸운다. 책에는 토사물이 묻고 핸드폰은 물에 빠진다.
<대학살의 신God of Carnage>을 쓴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는 현대 중산층의 가면 속에서 갈등이 부풀어 오르게 해 스스로 가면을 벗게 만든다. 2003년 필자가 본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아트Art> 또한 거실이라는 장소에서 세 친구가 그림 한 점을 두고 설전을 벌이다가 숨겨뒀던 감정을 폭발시키고 마는 내용이었다. 인물들의 이면을 희극적으로 서서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 작가의 장기인데 그 과정에서 사회 계층 간 갈등의 문제, 예술 애호 속에 숨은 가식의 문제, 대화 속에 숨은 폭력의 문제 등을 속속들이 들춰낸다. 짐짓 비극인 체하는 제목과는 달리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게 만드는 <대학살의 신>이 2010년 국내 초연 이후 한태숙의 연출로 다시 공연됐다. 
 알랭박지일 분과 아네트서주희 분, 미셸이대연 분과 베로니끄이연규 분 부부는 아이들의 싸움 때문에 각각 가해자 부모과 피해자 부모의 입장이 되어 만난다. 아프리카의 유혈사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 베로니끄는 아이의 앞니가 ‘중무장’한 상대 아이의 폭력 때문에 부러졌다고 사건을 요약한다. ‘중무장’이라는 말에 발끈한 변호사 알랭은 상대 부부의 말을 비꼬기 시작하고, 자신의 아이를 위해 어떻게든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어보려던 주부 아네트는 긴장된 상태를 못 이기고 토하고 만다. 생활물품 도매상인 미셸은 아내 베로니끄를 존중하려 애써왔지만 사실은 피곤해한다는 걸 들켜버린다. 이들은 왜 만났는지를 잊어버릴 만큼 서로 할퀴기 바쁘다. 자신의 남편도 아내도 적이긴 마찬가지다.
 무대는 거실에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에 더 집중하게 된다. “나는 대학살의 신을 믿어요.”라고 말하는 알랭과 “우리는 세계 시민이에요.”라고 말하는 베로니끄는 자신 있고 단호해 보이지만 결국 지성인의 오만과 가식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알랭은 대학살의 신을 믿는다고 말함과 동시에 제약회사의 입장에 서서 신약의 부작용을 감추려드는 자신의 악을 합리화한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투다. 베로니끄는 폭력에 얼룩진 세계를 주시하려는 투철함을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고통과 분노를 그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책을 거실에 전시하듯 놓아두고 아네트에게 자신의 취향을 과시한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믿는다는 쪽도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선언하는 쪽도 자신들의 일상은 우습기 그지없다.

 
 배우들은 말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거실을 왁자하게 만든다. 파란색 소파와 베이지색 소파에 각각 나누어 앉아있던 두 부부는 마치 스와핑이라도 하듯이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엎드려 토하는 아네트의 등을 두드려주려다가 그녀의 엉덩이에 붙어 민망한 자세로 서고 마는 미셸. 베로니끄의 이상적인 세계관을 공격하며 몰아붙이다 뒤로 꺾인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는 알랭. 자신의 짝에게 품고 있던 불만은 은근슬쩍 상대편 짝에 대한 호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달라지는 동선을 통해 인물들의 움직이는 마음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남 일 같기도 하고 내 일 같기도 한 소동 안에서 웃는다.
아이들은 끝까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부모들이 사건의 당사자로 위치하면서 무대는 보다 본질적인 상황으로 점프한다. 관계의 허울과 숨은 공격성을 들추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부모들의 진상도 알게 한다. 일본현대희곡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명동예술극장, 2012.1.29) 또한 <대학살의 신>과 같은 극작술을 보였다. 이지메 사건을 다루는데 아이들을 등장시키지 않고 부모들만을 한데 모음으로써 폭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삶의 이기에 주목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갈등을 어른들의 갈등으로 유머러스하게 옮겨놓는 극작술은 <대학살의 신>에서 일상의 소요와 아프리카의 유혈 사태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또 알랭이 변호하는 제약회사의 약이 미셸의 어머니가 복용하는 약이라는 걸 알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침 학교 폭력 문제에 직면한 한국사회에 눈을 돌린다면 이를 다쳐 ‘엉망’이 됐다는 아이의 얼굴과도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