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자백할 것이 하나 있다. 실은, 소설을 낭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의 행위인지, 잘 모르겠다. 낭독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 같은 건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도서관에서 봉사자를 모집했을 때 지원한 적도 있다. 게을러서 가진 못했지만 낭독회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작품을 듣고, 그 느낌을 공유하는 것은 무척 매력적인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낭독하는 것이 어떤 의미의 행위인지는 모르겠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눈이 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유전적 요인으로 시력을 잃었다. 보르헤스는 평생을 책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눈을 쓰지 못하게 됐을 때, 그는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온통 뒤섞여 그 진위를 가리지 못하게 되거나, 행여 망각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혼란은 보르헤스 소설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하나의 줄기로 엮였기 때문이다. 눈으로 소설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소설은 이미 보르헤스의 내면에 들어 있었다. 혼재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작동한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란 활자의 모음이나, 소리 내어 읽혀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내밀한 의식 안의 작용이다. 한 권의 책을 지금 내 앞에 가져와 읽는 것. 소리를 내든, 밑줄을 긋든, 달달 외우든 상관은 없는데, 어쨌거나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남김없이 내 안으로 가져올 때 비로소 소설은 성립된다. 앞을 볼 수 없었던 보르헤스가 위대한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 남김없이 읽어 내면, 그것은 영원하다. 그렇다면, 굳이 낭독이 필요할까? 누군가의 낭독을 들어도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식의 작용인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날짜가 지나가고, 결국 모든 낭독이 끝나기 직전에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을 들으러 갔다. 낭독된 소설은 김애란의 「칼자국」과 김연수의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농담」, 그리고 김미월의 「서울동굴가이드」였다. 한 회에 소설 한 편이 낭독되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칼자국」의 모든 공연이 끝난 후였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농담」과 「서울동굴가이드」의 낭독만을 들을 수 있었다.
 

만일 배우들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맡아 연기를 한다면, 그것은 낭독이라기보다 연극일 것이다. 그러나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은 공연의 모든 내용이 낭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극을 통한 재구성이 아닌 소설 텍스트에 대한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소설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소설 속의 대사를 읽는 배우들의 발성이라든가, 무대에 배치된 사물들이 독특한 긴장을 조성했고, 조명이나 음향, 배우들의 위치나 가벼운 몸동작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도 신선했다. 「서울동굴가이드」는 배치된 사물과 무대 효과를 통해 일종의 색채 같은 것이 재현되는 느낌이었고,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농담」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얽히고설킨 북촌의 지도처럼 유려하게 풀려 나왔다. 그 낭독들은, 분명 개인의 의식에 작용하는 소설의 단편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의식 바깥의 민감한 부분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그 근원에 소설이 있지만, 동시에 소설 바깥으로 무언가가 끊임없이 넘쳐 나오는 것이다.
 

공연에 대한 감상과는 별개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9월 10일을 끝으로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의 모든 공연은 끝났다. 이제 이 공연을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설사 공연의 내용이 그대로 재연된다 해도, 내가 ‘보고 들었던’ 낭독과 다른 이가 ‘보고 들을’ 낭독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어떤 순간, 개인이 느끼는 감각들은 재현 불가능하다. 새삼스레 놓쳐버린 「칼자국」의 공연이 아쉬워진다. 같은 일은 두 번 반복되지 않고, 이미 벌어진 일은 언제나 의식 밖으로 멀어진다. 내가 들었던 낭독도, 또 듣지 못한 낭독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이 역시도 소설의 작용과 비슷한 면이 있다. 보르헤스의 예를 다시 들자면, 의식 속에 영원히 작용할 것 같던 소설은 점점 멀어지거나 기묘한 방식으로 얽혀 버린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소설 밖의, 영원하면서도, 사라져 버리는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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