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있다.”
대학로 소극장 혜화동 1번지에서 상연된 연극 <반도체소녀>의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고 난 뒤에 느낀 소감이다. 이 말은 가톨릭 사제이자 철학자였던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의 좌우명이었다. 미래에 대한 헛된 기대야말로 지금 이곳의 ‘현재’를 키우는 희망을 잡아먹는 우상이라고 파악했던 철학자의 통찰이 묻어난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유토피아에 대한 환멸 내지는 경멸을 의미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의 논리를 유포하려고 이반 일리치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의 희망 혹은 희망의 미래를 ‘제작’할 수 있고 ‘판매’할 수 있다는 식의 싸구려 유토피아 담론에 맞서고자 했던 의도를 십분 읽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희망은 ‘공학’적 조작의 산물이 될 수 없다. 희망은 그 어떠한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루저(loser), 88만 원 세대, 잉여인간들을 위한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연극 <반도체소녀>는 이렇듯 역(逆) 유토피아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을 향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무대 위에 펼쳐 놓는다.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어찌해 보아야 함을 예술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 <반도체소녀>는 예비부부 정민·동용과 함께 세운·혜영 커플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여기에 호스피스(hospice) 정민의 환자이자 백혈병으로 숨진 반도체소녀와 함께 세운의 지도교수가 등장한다.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이십대 여성 노동자들은 말할 수 있는가. 목소리 없는 반도체소녀가 자신의 소박한 일상의 꿈을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대목은 연극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장면이다. 자신의 직업병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반도체소녀는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소유’하는 삶이 우리들의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할 때 희망은 실현 가능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연극의 한 장면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를 표방한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꿈의 공장’이 있다. 한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 전원이 비정규직 노동자인 동희오토가 바로 그곳이다. <반도체소녀>  에 등장하는 삼성반도체백혈병, 동희오토노동자 과로사,
재능교육해고 노동자 등의 사업장은 현실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모욕이 일상화되고 죽음의 문화가 미만(彌滿)한 세상에서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쁜 새것’을 위한 창조적 활력과 공감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예술이 ‘예술 자체’로 변질되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일 터이다. <반도체소녀> 외에도 용산참사를 다룬 <리스트>(2010) 등의 연극을 공연한 문화창작집단 ‘날’의 문화행동은 그래서 매우 소중하다. 특히 관객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려는 이들의 태도는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이번 <반도체소녀>에서도 무거워질 수 있는 극의 분위기 반전을 위해 1인 14역을 하는 배우 ‘멀티맨’을 등장시킨 것이 좋은 예다.

연극 반도체소녀 포스터

우리는 진보주의자들이 의분(義憤)에는 강하지만 풍자에는 약하다는 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멕시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의 마르코스(Marcos) 부사령관이 창조한 딱정벌레 기사 ‘돈 두리토’를 보라. 각종 성명서에 첨부한 이야기를 묶은 책 『딱정벌레 기사 돈 두리토Don Durito de La Lacandona』(2008)는 마야족 원주민들과 소통하고 세계의 독자들과 교감하려는 사파티스파의 문화행동 전략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이 여전히 이야기와 유머(개그가 아닌)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야기와 유머는 디스토피아라는 세련된 패배의 수사학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예술적 힘의 원천이다. 극장의 불이 꺼진 뒤, 우리들의 <반도체소녀> 2막은 그렇게 다시 오른다.

이미지 제공_ 문화창작집단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