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부처>(좌)와 <벽오금학>(우)의 공연장면

예술가는 일가(一家)를 이룰 때 스타일리스트가 된다. 작가 헤밍웨이(E. Hemingway, 1899~1961)는 ‘하드보일드’ 문체를 발명했고,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는 ‘엄밀한 안무’ 방식을 역시 발명했다. 여기서 발명이란 주어진 규칙을 깨면서 ‘어둠 속의 도약’을 저지르고 난 후에 생겨난 ‘의미’다. 우리는 스타일리스트가 된 예술가의 팬일 경우, 그 예술가의 작품을 어느 정도 예측하면서 관람하는 것이 그 도약이 갖는 의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공연 <블랙박스> 포스터

그런데 예술가의 그 스타일이 하나의 매너리즘을 앓을 때,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매너리즘은 반복의 강화라고 해도 좋다. <국립현대무용단 창단공연:블랙박스>이하 <블랙박스>는 어둠 속의 도약 없이 세련되었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단편들의 향연이었다. 예술감독 홍승엽은 자신이 댄스씨어터 온에서 공연해온 연대기적 작품들로부터 차출한 명장면들로 ‘갈라쇼’를 구성한 것이다. 홍승엽이 누구인가. 그는 한국무용계의 외부에서 스며들어와 무용계 전체에 엄청난 미적활력과 새로운 문맥의 안무를 보여준 기린아였다. <달 보는 개>1999년 작, <데자뷔>  2000년 작 등이 1990년대 유럽무대에서 각광을 받았던 것은 그의 안무적 독창성이 동시대적 지구적 수준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전성기의 작품들로 여기는 자신의 안무작들로부터 클라이맥스만을 떼어내어 갈라쇼를 보여주는 것은 ‘자기선전’ 혹은 ‘자기포박’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스타일리스트로서 꼬장꼬장한 미적취향을 선보이며, 전작주의를 고집해왔던 그가 이처럼 스펙터클의 시각효과에 선선히 자기 작품세계를 이용하게 내버려둘 줄이야. 이것은 <블랙박스> 공연의 면면, 구체적인 장면 자체가 나빴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연을 진행하는 퍼포먼스의 수준은 최상이었다.
<빨간 부처>2001년 작에서 선방 비구승들이 선(禪)을 둘러싼 악전고투를 보여주는 군무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고, ‘똥’과 ‘부처’를 일체로 여기는 성속과 미추를 넘나드는 연출은 여전히 유머러스했다. <말들의 눈에 피가>1999년 작는 여전히 공간 가득 일촉즉발의 긴장이 공포의 한순간으로 변할 듯했고, <벽오금학>2010년 작은 이 물질적 세계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반물질의 세계가 어떻게 출현하는지 여전히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 외 작품들도 부분으로서 완결되어 있었고, 무용수들은 홍승엽의 조련과 창단공연의 성격이 부여하는 에너지를 받아서 활기 넘치고 정확했다.
문제는 전체로서의 이 갈라쇼가 창단공연으로서 갖는 성격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어떤 폐쇄회로에 갇혀서는 안 되며, 거꾸로 폐쇄회로 증후군을 앓는 한국무용계에 새로운 ‘도약’의 디딤대로 작용해야 한다. 이것은 무용가들이 스스로 춤추고 스스로 자기 춤을 만끽하는, 자기만족적이며 낭만주의적 세계로부터 이탈할 수 있도록 모종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회적 요청이다.
물론 홍승엽 예술감독은 창단과정에서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은 징후가 역력했다. 그는 고립무원이고 주변에는 보수적인 인의 장막이 처져있다고 생각된다. 이 창단공연에 대해 ‘허니문 기간’을 빼고 직설적인 비판을 하는 이유는 그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무용단이 해줘야 하는 역할이 너무나 지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블랙박스> 공연에 대한 신비평적 분석보다 홍승엽 예술감독이 국립현대무용단의 항해를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일지도 모른다. <블랙박스> 자체만 본다면, 그는 이미 처음 이야기한 매너리즘을 둘러싼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예술가가 좋아하는 것은 창작의 충동을 반복하면서 일가를 이뤄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감독은 공공적인 열림과 소통을 통해 보다 많은 수용자들과 새로운 대화와 상상력을 촉발하는 것이다. 그 역할이 다르며, 예술가 개인의 딜레마를 여기서 반복하거나 순환궤도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한국이 세계경제 10위권 근처의 위상을 갖고 한류가 범세계적으로 유행한다는 소문은 확실히 변화된 우리의 시야를 요구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몸 쓰는 행위의 예술, 공연예술이 확 달라져야만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무용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지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미지 제공_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