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환상적이고 기발하다. 개미와 인간세계를 넘나들며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개미Les Fourmis』(1991), 사후세계 탐사단의 여정을 그린 『타나토노트Les Thanatonautes』(1994), 우주 속 유리감옥에 남겨진 최후 인류를 다룬 『인간Nos Amis les Humains』(2003) 등, 이렇듯 과학과 상상 그리고 이야기가 잘 조합되어 탄생한 베르베르의 소설은 문학이라는 광활한 우주를 공전하는 하나의 행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 베르베르 행성에는 수많은 베르나르족(族)들이 산다. 그의 책들이 국내에서 오백만 부(2009년 기준)가 팔렸으니 자가증식한 베르나르족-한 작품을 여러 권 사거나, 여러 작품을 구입한 독자-을 감안하더라도 그 수는 어마어마한 셈이다. 충무아트홀에서 공연하고 있는 연극 <인간>은 그런 베르나르족의 실체를 ‘오프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동명 작품을 무대로 옮긴 <인간>은 ‘사만타’와 ‘라울’이라는 두 주인공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출판사 광고문구에 따르면 작가는 이 작품을 “소설과 희곡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대사는 소설의 대화처럼, 지시문과 해설은 별다른 구분 없이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이라고 하면 내적 필연성에 기반해야 하는 법, 작품에서 그러한 맥락을 찾기란 힘들다. 그보다는 자유롭게 쓰고 쉽게 읽히려는 목적이라는 편이 솔직할 것 같다.

<인간>에서 과학자 라울과 조련사 사만타는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일어난 뒤 자신들이 유리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은 그들이 현재 상황을 마치 퍼즐 맞추듯 파악해 나가는 과정과 남녀가 한 공간에 있다면 누구나 상상할 만한 ‘밀고 당기는 로맨스’를 축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 폭력과 갈등, 자기파멸을 빚어내는 인류문명에 대한 비판이 끼어들며 주제를 넓혀간다.

원작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유리감옥이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와 과연 어떤 관객들이 극장을 찾을 것인지였다. 일단 유리감옥은 창살을 나타내는 레이저빔과 몸을 부딪치거나 주먹을 두드리는 배우들의 마임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막상 공연에서 유리감옥의 존재를 실감케 하는 것은 ‘객석’이라는 자리다. 배우들은 가상의 유리벽 너머에 관음증 기질이 다분한 관객들이 있으리라 추측하고 “어이, 당신들”하고 부르거나 다리 찢기, 텀블링과 같은 화려한(?) 개인기들을 보여준다. 이렇듯 자신들을 관찰하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들이 우리를 좀 뜨끔하게 하면서 묘한 사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연극의 한 장면


이야기가 흐르면서 유리감옥은 재판장으로 변한다. 핵전쟁으로 지구는 멸망하고 남은 것은 사만타와 라울뿐이다. 섹스를 통해 인류를 존속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둘은 가상재판을 연다.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만타와 “호모 호모니 루푸스(Homo Homoni Lupus)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라틴어 경구”라는 라울의 대립이 자못 팽팽하다. 그 사이에서 자연스레 재판의 방청객 역할을 맡은 관객은 인류의 공과 폐해를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할 위치에 놓인다. 정말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망망대해 우주에서 기꺼이 아담과 이브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을까.

결말에 이르러 관객들의 위치는 또 한 번 변한다. 유리감옥이 ‘애완용 인류’를 기르는 사육장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사육장 주인은 인류를 햄스터처럼 다루는 거대한 외계종족으로 사만타와 라울을 쇼핑해 자기네 행성에 데려왔다. 이렇게 외계종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무대와 객석, 등장인물과 관객을 가르던 ‘제3의 시선’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게 된다. 사만타와 라울을 엿보는 관객이나 재판의 방청객 대신, 외계종족에게 관찰당하는 인류, 곧 유리감옥 속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서게 되는 것이다. 외계존재가 일정한 암시나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힌다. 실물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실감을 전한다고 할까.


연극 <인간> 포스터


하지만 <인간>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다. 거칠지만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을 지닌 사만타와 냉정하고 이기적인 듯하지만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라울. 두 인물의 대비는 흥미롭지만 극의 긴장감을 이어가기에는 역부족이다. 둘 사이에 사사건건 부딪치는 에피소드들은 지루할 만큼 길고 갈등이 해소되어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장면은 너무 갑작스러워 당황스럽다. 역사, 예술, 철학 등을 끌어들여 인류의 운명을 논하는 대결도 상식 수준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베르 행성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린책들ㅣ2009

사실 문학을 읽는 사람들이란 대개 ‘바깥’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상의 법칙들로 가득한 여기를 떠나 문학의 세계를 유랑한다. 여행 온 거리만큼 현실은 낯설어지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깨닫거나 들여다보거나 잊거나 야유할 수 있는 자유도 생겨난다. 외계행성의 유리감옥에 와서야 자신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던 사만타와 라울처럼.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열렬히 추구하는 가치다. 하지만 문학에서 그러한 가치들이 진정성을 지니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교조주의에 이용되고 때로는 그럴싸한 포장지쯤으로 전락한다. 아니, 사실 요즘은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촌스러운 일이 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간>에 등장하는 현실비판들은 배스킨라빈스의 버라이어티팩처럼 다채롭다. 페니키아(Phoenicia)의 멸망에서 동물실험의 잔혹성까지, 과거와 현재의 문제들이 속도감 있게 열거된다. 그 비판의 첫맛은 입안이 서늘할 정도로 차갑지만 곧 달콤한 본색을 드러내고 가뭇없이 녹는다. 그러니 베르나르족 가운데는 사만타처럼 “누가 이런 여행 시켜달라고 했나?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라고 투덜대며 다른 행성으로의 티켓을 끊는 이들도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자유롭게 떠도는 여행족들이야말로 문학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빅뱅(big bang)시키는 원동력이니 말이다.


연극의 한 장면

이미지제공_충무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