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검사와 여선생>포스터

영화만큼 테크놀로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예술도 없다. 최근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는 <아바타>를 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기존의 2D영화와는 다른 3D영화, 즉 3차원적 입체영화라는 새로운 기술에 매혹된 관객들의 발길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3D영화 시대에 초창기 영화이야기를 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여길지 모르지만, 불과 90년 전 한국영화의 시작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1900년을 전후해서 조선에 영화가 소개되었지만, 조선인들에 의해 최초의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19년의 <의리적 구토>1였다. 상영되는 영화만 구경하던 조선인들 가운데 영화에 대한 욕망을 느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었다. 연극을 하던 도중 중요한 장면에서 무대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내려와서 연극의 내용을 이어 영화가 상영되는 방식이었다. 무대의 장소 변경을 새로운 매체의 욕구로 대체한 것이다. 이처럼 연극 도중에 짧게 영화가 도입된 방식을 연쇄극이라고 불렀다.

이런 연쇄극이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한 무성영화, 당시 말로는 활동사진의 시대가 열렸다. 이때 등장한 것이 변사였다. 변사는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같은 영화라도 누가 해설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변사의 목소리 톤, 이야기 전개 방식, 특이한 행동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무성영화 시절 단연 최고의 스타는 배우도 아니고 감독도 아닌 변사였다.

그러나 변사의 시대는 유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저물고 만다. 스크린에서 직접 배우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영화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1930년대 초반이 되면 일류 극장에서 변사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무성영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필름으로 남아있는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감독, 1948)도 무성영화이다. 해방 후 자본이 부족했던 영화계에서는 제작비가 유성영화의 절반 이하밖에 들지 않는 무성영화를 계속해서 제작했는데, 이렇게 만든 <검사와 여선생>은 당시 엄청난 흥행을 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전형적인 신파풍의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천사처럼 예쁜 여선생님은 가난한 제자 창손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준다. 결혼 후 학교를 떠났던 그녀는 탈옥수를 숨겨준 일로 남편의 오해를 받아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 남편이 실수로 죽고 만다. 마침 이 사건의 담당 검사가 창손이라서 그녀의 무죄를 밝혀내 석방시킨다는 이야기이다.2
이제까지 무성영화 시대를 이야기한 것은 최근의 흥미로운 공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공연은 연극이라고 칭하기에도 어색하고 영화라고 칭하기에도 마땅치 않다. 공연의 형태는 이렇다. <검사와 여선생>의 필름을 배경화면으로 무대에 올리고 변사가 영화를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전형적인 무성영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사와 여선생>의 필름 가운데 소실된 부분은 배우들이 직접 연기를 한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연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이 지극히 신파적이니까 초창기 조선영화의 경험을 온전히, 한 번에 모두 다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즉, 변사, 무성영화, 연쇄극, 신파 등 초창기 조선영화를 규정짓는 요소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현대적 변용도 있으니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이런 공연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공간이 되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전 세대가 겪은 새로운 근대의 체험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추억을 상품화한 것인가, 통섭의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퓨전인가? 새로운 감각을 살려 젊은 세대를 겨냥했다는 점에서는 전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없고, 초창기 조선영화의 여러 요소들을 한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후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해법은 이 공연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