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피터 쉐퍼(Peter Shaffer)1926, 영국, 작가의 <에쿠우스>(극단 실험극장, (주)연극열전)가 무대에 오른다. 이미 1970년대에 한국연극계를 강타했던 이 작품은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관객의 사랑을 받았고, 초연 때의 김영렬 연출 이외에도 김아라, 한태숙, 김광보 등의 빼어난 연출과 다이사트 역의 김동훈 신구, 알렌 역의 강태기, 최민식, 송승환, 조재현 등 스타 급 배우들이 거쳐간 문제작이다. 아마도 이 문제작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기현상만은 아닌 것이, 최근 영국에서도 <해리 포터>의 주인공 다니엘 래드클리프(Daniel Jacob Radcliffe)가 주인공 알렌 역으로 연극에 출연하면서 관객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고작 몇 년 전의 감각이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기증 나는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 <에쿠우스>가 이처럼 꾸준히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뭘까. 현대인의 욕망과 고독을 자극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근원적으로 사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학자나 비평가를 비롯한 소수 연극 마니아들은 무대가 제시하는 철학적 사색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갖지 않은 초보 관객들은 자극적 재미만으로도 만족할 줄 안다. 그러나 진정으로 좋은 연극은 모든 계층이 즐길 수 있는 광장의 예술로 철학과 감각, 존재에 대한 깊은 사색과 대중적 선정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는 그 양자를 충족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알렌이라는 소년이 마굿간에서 여섯 마리 말의 눈을 꼬챙이로 찌른 엽기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년의 치료를 의뢰받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최면치료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알렌의 과거와 가족관계를 추적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다이사트는 자신을 말(馬)과 동일시하고 경배하는 이 신비한 소년에게 차츰 매혹되면서 상식에 맞추어 소년을 치료하려는 자신의 역할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연극 <에쿠우스>의 한장면]

그도 그럴 것이 다이사트 박사는 아내와의 관계에 깊은 권태를 느끼며 일중독자로 일만 하거나 시간이 나면 고대 그리스 관련 서적을 뒤척이면서 신화를 꿈꾸는 고독한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반면 알렌은 상식의 눈으로 보면 환자이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현대인에게 결핍된 신화와 근원에 대한 에로티시즘의 충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신에 대한 광란의 사랑에 불타오르는 부두교의 사제처럼 말과 교감하는 알렌의 삶에 현대인의 어떤 권태와 타성이 끼어들겠는가. 쉐퍼의 <에쿠우스>는 그렇게 신화와 현대문명, 열광과 일상의 권태를 교차시키면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두주인공 송승한,정태우_좌,우]

필자가 이 공연을 처음 본 것은 1990년 김아라 연출가가 공연했을 때였다. 20대였던 필자는 그 무렵 소년 알렌의 사랑과 혼란에 전율하면서 공연을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이 공연을 보니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알렌을 부러워하는 다이사트의 관점에 더 큰 공감을 하게 된다. 특히 다이사트 역의 송승환(조재현 공동 출연)은 그 동안 중후한 모습으로 알렌과 부자지간인 듯 수직 관계를 형성했던 다이사트 역 대신 알렌과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면서 형 같은 모습으로 변신을 시도하였다. 덕분에 완벽해보이던 다이사트 대신 결함을 가진 한 인간을 본 느낌이다.

끝으로 납득할 수 없는 한 가지! 2010년 연극열전 오프닝 공연으로 기획된 <에쿠우스>의 연출은 배우로 직접 출연까지 하는 조재현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연출가의 등장인 셈인데, <에쿠우스>의 새로운 무대를 기대했던 관객의 기대와 달리 과거 김광보 연출이 공연했던 무대와 너무나 흡사했다. 무대의 시각적 이미지, 절정 장면에서의 회전무대 사용,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배우들을 처리하는 방식 등등. 심지어 프로그램에는 “김광보의 에쿠우스, 무엇이 다른가”라는 드라마투르그(Dramturg)1의 과거의 글까지 실려 있어 이 공연의 진정한 연출자가 누구인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막을 올리기 전에 그 혼란을 정리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2010년 연극열전의 출발이 불안하다.

[에쿠우스포스터최종]

이미지 제공_ 연극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