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의 잔혹극과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1912~1994)의 부조리극에 영향을 주어 부조리극의 서막을 알렸다고 평가받는 러시아 극작가 다닐 하름스(Daniil Kharms,1905~1942)의 단 하루뿐인 공연!

바로 그 작가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엘리자베따 밤(Elizabeth Bam)>이 국내에선 단 하루만 공연을 한다니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작품에 대한 재조명과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유럽을 경악시켰다는 아방가르드 작가인 다닐 하름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연구소와 연기학교에서 많은 세미나와 워크샵을 열고 있는, 발성과 신체언어의 권위자인 연출가 유리 바실리예프(Yuri Vasiliev)의 작품이라는 것이 발품을 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엘리자베따 밤>은 서정적이면서 비극적이며, 유쾌한 익살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언뜻 카프카(Franz Kafka,1883~1924)의 『심판』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어 흥미를 더욱 자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기자들이 주고받는 언어를 통해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유추하고 줄거리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가 살았던 스탈린 시대를 알아야 하는데,  무시무시한 철권정치가 자행되던 1920년대 러시아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막이 오르면 공영아파트에 살고 있는 엘리자베따 밤을 KGB가 체포하러 온다. 그녀는 사다리로 피신하고, 출입구에선 문을 부술 듯 긴장감이 연출된다. 이 장면은 엘리자베따 밤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마지막 장면과도 동일하게 진행되는데 극중 유일하게 리얼리즘 연극으로 진행되는 부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장면부터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엘리자베따 밤을 체포하러 온 KGB들이 갑자기 마술을 보여주고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후로는 각기 다른 삽화들이 전개되는데 놀랍게도 표현장르가 다 다르다. 코미디, 오페라, 마임, 연극, 합창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면서, 이를 통해 1920년대의 생활상과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 러시아 소시민들의 즐거움, 진실함, 행복함 등이 삶에 대한 끈질긴 희망으로 재현된다. 이 희망은 시종 웃음으로 연결되는데, 상황 자체의 황당함이나 각 인물들의 정형화된 바보스러움, 사건에 대한 갑작스런 반응, 무의미한 행동의 계속적인 반복, 느닷없는 결말 등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웃음의 이면에 죽음과 폭력, 도덕적 마비, 정체성 상실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어 아주 냉소적이다. 

무대를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줄과 그 위에 걸린 옷가지들, 그리고 자전거와 악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사다리가(모두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님) 전부인 단출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열아홉 개의 에피소드가 때로는 어처구니없이 가볍고, 우습고, 슬프고, 단순하고, 음악적이고, 율동적이고, 마임적이고, 그래서 비논리적으로 전개된다. 극의 종결 부분에 이르면 마침내 엘리자베따 밤은 체포되어 KGB에 끌려간다. 작가는 이 희곡 한 편에 다양한 장면들을 모아서 현실의 부조리를 느끼게끔 하였다고 했는데, 사실 이러한 의도는 작가 다닐 하름스라는 이름이 생소한 이번 공연의 관객들에게는 전달되지 못한 듯싶다. 특히 여주인공의 분신에 대한 설명부족과 인물 간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부족으로 이 희곡의 중심에 있는 언어와 소통의 문제가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다. 따라서 일반 관객들은 작품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부조리극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듯하다. 어쩌면 연출자와의 의사소통 부족으로 연기자들의 표현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연기자들의 발성과 신체언어가 출렁대는 듯한 에너지로 넘쳐흘러 관객들의 시선은 내적인 의미보다는 연기자들의 외적인 움직임에 고정되어버린다. 따라서 작가 다니엘 하름스에 낯선 한국 관객들에게는 작품의 의미보다 전형적인 연기의 틀에서 벗어난 연기자만 보일 뿐이다. 이것은 유리 바실리에프라고 하는 연출가의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훈련방법이 일정한 효과를 나타내기는 했지만,배우들의 자연스런 자기표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번 작품은 희곡 자체가 갖는 문학성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했다. 비록 작품의 깊이와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이러한 워크샵을 통해 연기 트레이닝을 하는 경기도립극단 단원들의 열정과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은 이것이 목표를 향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공연 장르가 존재하는 작품을 통해 연기자들의 트레이닝 효과를 높이고, 관객들은 인간 내면을 가까이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라고 한 유리 바실리예프의 말처럼 경기도립극단 단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비록 완숙한 면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트레이닝을 한 셈이다.

작품을 통해 다양한 트레이닝을 시도한프로그램이 국공립 단원들은 물론 기성배우들을 위한 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공연하는 기회를 가져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