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나라 근현대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08년 이인직의 <은세계> 공연을 기점으로 할 때 그렇다. 물론 ‘한국연극 100주년’이라는 명칭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칫 이미 장구한 세월 동안 존재해온 우리 고유의 연희를 연극과 분리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즘 흔히 보는 형태의 연극이 시작된 지 100년이라 이해하는 정도면 될 것이다.

어휘에 대한 논리적 고민을 좀더 진행시켜 보겠다. 흔히 ‘창작극’이니 ‘창작희곡’이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다. 연극이건 희곡이건 창작이 아닌 것이 없을 텐데 굳이 그런 수식을 붙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소설이나 시에 대해 ‘창작소설’이나 ‘창작시’라는 표현을 쓰는 일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우리 근현대극이 일본을 통해 서양연극이 유입되면서 출발했고, 따라서 상당 부분 번역에 의지했을 수밖에 없었을 터, 외국희곡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극’과 ‘번역희곡’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 우리나라 작가가 직접 쓴 작품에 대해 ‘창작’이라는 수식을 붙인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번역과 번안이 주도하는 분야에는 ‘창작’이라는 말이 비슷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창작동요’니 ‘창작오페라’니 하는 표현이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창작극’과 ‘창작희곡’이라는 표현이 집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가 아닌가 한다. 1970년대는 우리연극에 소극장운동의 바람이 분 시기이다. 실험성이 강조된 그 운동이 택한 대상은 주로 유럽의 현대작품이었는데, 대부분 부조리 계통인 이 작품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대량 유입되었던 영미희곡과 합해져 그야말로 외국희곡의 홍수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1970년대의 또 하나의 특징인 ‘우리 것 찾기’ 바람과 충돌하고, 그 결과 아직도 상용되는 ‘번역극의 범람과 창작극의 부진’이라는 상투구가 등장한다. “번역극이 많으니 창작극이 설 자리를 못 찾는다”는 이 소박한 논리는 이후 다양한 결과로 이어진다. 연우무대나 세실처럼 창작극만을 고집하는 극단들도 탄생하고, 대한민국연극제와 서울연극제는 몇 년 전까지도 창작극만을 참가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외에도 신춘문예를 비롯한 창작희곡 공모도 대단히 활발해졌다. 물론 40여 년에 이르는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창작극의 현주소는 여전히 불만스럽다. 양적으로 보인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곡의 질이 ‘얼마나 넓게,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공연되느냐’를 통해 판별된다 할 때 우리 창작희곡 중 그런 대상이 되는 작품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런 불만은 당연하다.

연극<침향>의 한장면    

그러나 해외까지 소개되기에 우리 문학과 예술전반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정도이니 더 지켜볼 일이라 하고, 국내에서 재공연되는 작가나 작품도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영진(吳泳鎭, 1916~1974), 차범석(車凡錫, 1924~2006), 최인훈(崔仁勳), 오태석(吳泰錫), 이강백(李康白) 정도는 분명히 꼽을 수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분히 차범석의 <산불>일 것이다. 연극을 넘어 다양한 장르로 공연되어 왔고 최근에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잘 살펴보면 창작희곡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 속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들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피상적인 대책으로 인해 투자의 효율성이 떨어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양적으로 많아지다 보니 우수한 작품이 탄생할 확률도 높아졌으며, 창작희곡의 전반적인 활성화는 희곡에 대한 각성 또한 높여 온 것이 분명하다. 즉 질적인 면에서 아직 임계점을 넘어 분출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근접해가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분출을 향해 조금씩 축적되어 가는 에너지의 예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젊은 연극인들의 각성이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모르는 말에 대해 의심 없이 표현하기를 거부하였다. 부정확한 번역희곡을 마치 경전을 다루듯 무조건 맹종하며 따르기보다는 나름의 소화가 가능한 방법과 그런 부분을 찾아 재구성하는 쪽을 택했다. 물론 정확한 번역을 통한 완전한 이해 후에 그런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훨씬 큰 발전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중간 점수는 받을 만한 자세였다.

사실 우리연극에서 희곡은 거의 바이블(Bible)이었다. 그것은 번역희곡에서 더욱 심했다. 부정확한 번역과 문화의 차이로 인한 난해함과 혼동이 따랐고 그 난해함은 엉뚱하게도 해석 능력의 부족이라 스스로 자책하며 희곡의 글자 하나하나를 받들어 모시는 미신으로 연결되었다. 번역희곡의 난해함과 모호함이 창작희곡에까지 영향을 미쳐 마치 그렇게 써야만 훌륭한 작품이라는 집단적 착각현상을 만들어냈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각성된 연극인들은 더 이상 그런 미신을 따르지 않는다. 희곡을 바이블의 자리로부터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상실은 우리희곡에 새로운 기회가 된다. 희곡이 더 이상 바이블이 아닌 세상에서 희곡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이제 모호함이 아닌 구체성을 덕목으로 삼게 된 것이다. 우선은 극작 겸 연출이 유행처럼 등장한다. 아마도 남의 것을 해석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극작과 연출의 분화는 이미 오래 전 이루어진 진화의 결과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바로 뒤를 이어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한다. 이번 제1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한 김명화(金明和)도 그 새로운 작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수상작 <침향(沈香)>은 김명화가 이제 ‘새로운 작가’나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벗어도 좋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분단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나름의 담담함은 상당한 성숙을 바탕으로 한다. 비록 명시적으로 제시한 ‘화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글쎄, 아직은…” 하며 의문들을 표하기도 하지만, 박정자, 손숙, 박인환, 정동환 등이 필생의 연기력을 쏟을 만큼 충분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 창작희곡의 ‘버틸 힘’으로 존재하다 작고한 차범석과 새로운 ‘이끌 힘’으로 등장한 김명화의 만남은 그래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이미지 제공_ 신시뮤지컬컴퍼니

吳世坤 1955년 서울생. 극단 노을 대표. 저서로 『배우의 화술』 등. ohskon@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