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풍성하다. 얼마 전 인천에서는 제26회 전국연극제를 <한국연극 100년 기념展> 등과 연동하여 진행하였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젊은 연극인들의 고전 넘나들기’라는 제목으로 젊은 연극인의 안목으로 연출된 세 편의 한국희곡 고전 김우진(金祐鎭, 1897~1926)의 〈산돼지〉(김수연 연출), 박승희(朴勝喜, 1901~1964)의 〈고향〉(이정하 연출),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의 〈원술랑〉(신용한 연출)을 연이어 상연하였다.

수산(水山) 김우진의 〈산돼지〉가 상연된다는 소식에 일찍부터 기대와 흥분이 있었다. 여타 두 작품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박승희의 〈고향〉이나 유치진의 〈원술랑〉은 무대를 그려보는 것이 얼마간 수월하다. 그러나 김우진은 다르다. 필자의 박사논문 대상이 김우진이었고 해서 그의 작품에 대해 나름으로 전문가라면 전문가지만 수산의 〈산돼지〉는 여전히 충분히 포획되지 않는 역동성과 다성성으로 충만하다.

구한말,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를 누렸던 안동 김씨의 일원으로 당상의 벼슬을 지냈으며 전라도 목포와 장성 일대에 무려 칠천석지기 대토지를 소유했던 유수한 지주의 장남, 수산 김우진은 1926년 집안과 절연을 선언하며 출가했다. 뜨겁고 습하기 짝이 없는 6, 7월 여름의 도쿄, 당대 최고의 쓰끼지(築地) 소극장에서 연기와 연출을 공부하던 해성(海星) 홍주식(洪柱植)의 좁은 하숙에서, 소설 「낙동강」으로 카프의 1차방향전환의 계기를 생산했던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1894~1938)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영감을 받아, 수산은 「산돼지」를 썼다. 이 작품을 탈고하고 불과 사흘 만에 대한해협에서 투신자살을 감행하고 말았으니 「산돼지」는 그가 의욕을 가지고 쓴 첫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는 완성된 희곡을 포석에게 보내면서 “이것의 연출은 지금 조선의 무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부연하였다.

긴 시간이 흘렀다. 1966년에 서울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공연(연출 허규)으로 상연이 시도된 흔적이 남아있으나 이 공연에 대한 후속평가가 분명치 않으니 이번 공연이야말로 수산을 겨눠보게 하는 의미있는 공연으로는 단연 첫손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제2막에 있다. 1막에서 주인공 원봉은 모 청년회의 상무간사로 일하면서 저지른 횡령문제 때문에 내외의 공격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위에는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비루하면서도 체면을 따지거나 음흉하면서도 정의를 내세우는 인간들뿐이다. 이 같은 암울한 현실에 원봉은 병들어 눕고 만다. 2막은 그러한 원봉이 동학도(東學徒)였지만 자신의 아내를 부인했던 아버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는 양부모,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타산적인 여동생, 자신을 배신한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적시하고 감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작품은 뜨겁게 요동치고 논리는 와해되며 감정은 극적 외피없이 직설된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의 표현주의적인 성격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 형식적 측면을 해명하는 일은 일단 미뤄두자. 이 격정의 2막을 디디고 3막에 이르러 원봉은 드디어 애인 정숙도 누이 영순도 모두 떠나보내고 세상의 일원으로 홀로 서서 자신의 책무를 승인한다. 봄 잔디밭 위에서 하늘과 땅의 일치를 경험하는 원봉의 성숙이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2막의 설득력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을 맡은 김수연의 해석은 충분히 주목에 값한다. 특히 이불을 오브제(objet)로 삼아 대사를 비대화적으로 풀어낸 점은 간단하면서도 비사실주의적인 수산의 상상을 제대로 이해했기에 가능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김수연의 해석이 이를 감당하기에 충분히 역동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구름 위로 올라가 홍진(紅塵)에 묻힌 세상을 내려다보면서도 세계와 단호히 절연한 채, 산 위에서밖에 크지 못하는 산돼지의 숙명을 긍정하는 원봉. 그의 결단은 치열하게 갈등하고 투쟁하는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위대한 형질전환의 순간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막은 논리와 이해를 넘어 비약과 초월의 계기를 맞아 진실을 깨닫는 ‘요동의 순간’으로 표현했어야 했다.

물론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수연 연출의 〈산돼지〉가 괜찮은 작품이라는 것에는 문제 없이 동의할 수 있다. 수산은 이루지 못했으나 그가 제기하는 비판과 투쟁의 지점이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데는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尹振賢 1968년 경기도 시흥생. 연극평론가. 저서로 『풍경, 함세덕』, 『행복한 인천연극』 등. wb4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