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립극단은 지난 2006년 9월 22일부터 10일 동안 아서 밀러의 문제작
<시련>을 가을 무대에 올렸다. 미국의 대표적 극작가인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세일즈맨의 죽음> <시련> 같은 작품을 통해 미국이라는 ‘신세계’의 본질을 집요하게 비판한 작가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아메리칸 드림’에 희생된 이민자들의 비극적인 삶을 다뤘다면, <시련>은 미국 정신의 이면에 있는 ‘박해 의식’이라는 자폐적 광기를 비판한 작품이다. 물질적 성공을 삶의 최고 척도로 간주하는 것과 자신들의 선의가 항상 악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는 박해의식은 건국 이래 지금까지 미국 정신을 형성한 중요한 두 가지 요소였다.

<시련>은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의 광기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에는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밀고해야 했던 매카시즘 희생자로서의 작가 자신의 고통이 담겨있다. 물론 이 작품의 소재는 식민지 정착 시절 뉴잉글랜드의 세일럼에서 있었던 유명한 마녀사냥 사건이다. 1692년의 어느 날 엄격한 청교도 규율에 갇혀 지내던 몇몇 소녀들이 갑자기 환상을 보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는 <시련>의 주인공 존 프록터가 잘 파악하고 있듯, 마을 사람들 간의 사적인 복수심과 재산권 쟁탈이 마녀사냥의 숨은 동기였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목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거짓 자백과 증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결국 이 사건으로 19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이 유명한 집단 광기는 또 다른 뉴잉글랜드 출신 작가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주홍글씨>에도 잘 그려져 있다.

그런데 왜 밀러는 세일럼의 마녀사냥에 주목했을까? 왜냐하면 마녀사냥이 밀러가 경험한  미국 정신의 무서운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낯선 존재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 자신의 선의가 박해받고 있다는 강박관념, 그래서 자신과 같은 편이 아니면 결국은 악의 편이라는 극도의 순결주의로부터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는 시작되고, 마침내 이런 공포심은 집단 히스테리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선이 위협받고 있다는 히스테리적 광기는 세일럼 사건 이후에는 인디언과 흑인에게로, 1950년대에는 매카시즘으로, 지금에 와서는 반(反)아랍주의로 휘몰아치고 있다. 과거에는 이 공포심이 미국 내의 타자들에게로 향했다면, 지금은 미국 밖의 타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다. 인천시립극단의 이종훈 예술감독도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희생되는 힘없는 사람들,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마녀사냥식의 횡포를 자행하는 광기를 지금-여기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기에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두 시간 정도 공연된 인천시립극단의 <시련>은 밀러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달하는 데 손색이 없다. 청교도적 순결주의 규율에 질린 세일럼의 소녀들, 위선적인 교회 권위에 반발하는 가난한 농부 프록터, 결국 진정한 선이란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임을 프록터의 순교를 통해 깨닫게 되는 부인, 이들 간의 격정과 고통, 탄식과 슬픔이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를 통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공연의 열기에 젖어 극장을 나서면서 나는 거짓 고백과 배신을 통해서만 자신이 독실한 신도이자 애국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해 생각했다. 바베이도스에서 끌려온 순진한 노예 티투바, 온화한 인품을 지녔던 할머니 레베카, 정이 많은 자일즈,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직시했던 프록터. 이런 고귀한 인물들이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건설된 ‘신세계’는 과연 어떤 곳일까, 하는 생각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라크에 파병된 유색의 어린 군인들, 손잡고 거리를 걸어가는 히잡을 쓴 여자들, 폐허 속에서도 웃는 아이들, 팔다리가 잘린 소년들, 이들을 모두 잃고 나서 만들어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곳이 될까. 로렌스(D. H. Lawrence)는 일찍이 미국 정신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도관을 묻는 일과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미국이 잘하는 두 가지 전공 분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