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를 갈무리하고 남산 국립극장을 찾았다. 영어로 ‘마담 화이트 스네이크(Madame White Snake)’라고 불리는 백사(白蛇) 이야기가 상연되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 살고 싶은 요괴, 하얀 뱀 백소정은 시녀인 푸른 뱀 소청을 데리고 아미산에 내려온다. 여기서 허선이라는 약방 청년과 그녀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비처럼 사랑이 찾아온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며 진정 인간다운 삶을 누린다. 하지만 요괴 잡는 노승 법해도사가 나타나 허선에게 그녀와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백소정이 사랑을 미끼로 허선을 잡아먹으려 한다면서 그녀의 정체를 알려줄 황학주를 건넨다. 그는 그녀에 대한 불신에 휩싸인다. 마침내 황학주를 마신 백소정이 정체를 드러내자 허선은 기절하여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사랑을 택한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허선의 목숨을 구하려 한다. 선계의 영지를 따러가는 용감한 행동으로 요괴적인 본성을 극복하고 인간적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법해는 불공드리러 온 허선을 금산사에 가둔다. 허선의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된 몸이지만 그녀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법해도사가 보낸 군사들과 물위에서 싸움을 벌이게 된다. 한편 살아난 허선은 금산사를 몰래 빠져 나온다. 그는 단교(斷橋)끊어진 다리라는 뜻에서 백소정과 재회하고 앞으로의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정작 공연을 보면 일반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가 이러한 이야기꺼리보다 외재적 화려함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릇인 경극(京劇)은 노래와 동작이 함께 어우러져 있지만 그중 한 가지가 더욱 두드러지곤 하는 특징이 있다. 말하자면 노래감상 위주인 경우와 동작감상 위주의 극이 나뉘어 있다. 그것은 노래와 동작을 모두 잘하는 연기자가 드물기 때문에 연기자의 장기를 살려 연출하는 중국극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경극은 중국의 고전시기가 끝날 무렵인 청대에 이미 대형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여자주인공의 ‘섹시함’ 하나만으로 충분히 관객을 맞이할 수 있었던 극단은 보다 많은 전쟁영웅과 볼거리들을 준비해야 했다. 또한 당시 동호회 클럽활동과 같은 아마추어 극단(이것을 중국에서는 시미(迷)라고 한다)까지 결성한 관중들은 이미 프로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따라서 연기자들은 무대 안에서 모든 것을 선보일 수 있어야 했다. 게다가 고난이도의 기술도 완벽하게 갖추어야 했다.

<백사전>은 이러한 경극의 대형화와 복잡화라는 시대분위기가 안착될 무렵, 고전을 완전히 재해석하고자 한 중국의 현대작가 톈 한(田漢 , 1898~1968)에 의해 2시간 30분짜리 공연으로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고전이 이미 끝난 현대에 어떻게 하면 고전을 그리워하는 관중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높은 수준을 맞출 수 있겠는가 하는 고도의 ‘고전(Classic)’작품 재구성이라는 문화전략의 선상에 선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관중들은 단조(minor key)로 이루어진 엄청난 분량의 고난이도 기교가 담긴 노래를 충분히 들을 수도 있고 화려한 액션을 볼 수도 있다. 가령 백사가 허선과 사랑을 나눌 때 우리의 귀는 충분히 즐거워진다. 또 그녀가 허선을 위해 수중전을 벌이거나 영지초를 따러갈 때에는 화려한 볼거리에 감탄하게 된다. 천년 수도한 백사답게 화려한 동작과 노래로 그녀의 영험함을 경험토록 해주는 것이다. 요괴냐 사랑이냐 정의냐 하는 정신적 물음은 이렇게 화려한 무대매너 속으로 사라진다.

요괴의 사랑에 아랑곳없는 한국의 관중들도 서커스와 같은 연기자들의 화려한 묘기에 감탄하며 극장을 떠났다. 나 또한 화려한 볼거리에 이끌려 내내 백사와 사랑을 하였다. 경제논리는 생각나지 않았다. 요괴의 슬픈 운명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청각적으로 즐거웠다. 그래서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밖에 성립되지 않는 그런 백사이야기였다. 무서운 백사, 하지만 오늘 저녁 너의 그 몸짓은 정말 유혹적이었어! 극장 밖 ‘인간’으로 돌아온 나는 백사에게 홀렸던 허선처럼 그렇게 가을 노을 아래 아무 생각 없이 미소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