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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며, 애도하며
통권 : 55 / 년월 : 2016년 1,2월 / 조회수 : 2271
신재훈 연출, <시간의 난극>(인천다락소극장, 11월 26일~29일)

기억하며, 애도하며

신재훈 연출, <시간의 난극>(인천다락소극장, 1126~29)

 

정재우

 

연극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 소극장으로 들어가면, 텅 빈 무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떤 직접적인 조명도 없지만, 실내등을 통해 어슴푸레 보이는 그 공간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시간의 난극>(신재훈 연출)은 세 개의 작은 조명이 무대 위에 있어 상대적으로 무대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무대의 배경에는 큰 벽에 적당한 간격으로 세 개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앞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몇 개의 나무 상자가 가지런히 연결되어 있다. 무대 가운데는 하나의 상자가 있다. 무대 옆에는 각각 두 개의 기둥이 간격을 두고 서 있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배우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기둥 위에는 계란이 가득 담긴 몇 개의 계란판과 석고상이 놓여 있다. 무대 위 상자들은 배우들이 다양하게 활용할 소도구로 기능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좁은 소극장 무대를 충분히 사용하려는 선택이다. 그러나 배경에 있는 벽과 그림, 그리고 무대 옆에 서있는 기둥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친절하지 않게 꾸며진 이 무대는 난극을 표현하고 있다. 뭔가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의미들이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무대이다. 또한 배경의 그림들은 연극이 끝난 후에야 어렴풋이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배우들은 할머니의 시간, 닭이 알을 낳고, 알이 부화되는 시간을 통하여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을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이 설명은 배우들의 능숙한 연기로 인하여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제 관객은 연극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연극은 그러한 시간의 개념에 관객들이 집중할 수 없게 전개된다. <시간의 난극>의 이야기는 목표 지점을 향하여 차근차근 밟아 나가지 않는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름의 무게를 가지는데, 그것이 시간에 대한 사유를 지속해서 방해한다.

 

시간의 개념을 설명해준 이후, 하루를 가치 있게 살려고 애쓰는 한 여성의 이야기, 교회를 나오면서 사랑한다고 얘기해주는 교인을 죽인 살인자의 이야기, 아버지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을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여인의 이야기, IS가 일본인을 억류하는 이야기, 처가살이 하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 전도유망했던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빠르게 지나간다. 이 일화들은 관객이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들을 드러낸다. 사건들이 연속해서 짧게 연결되어 제시되지만, 이전에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이 다시 일어나며 그 파장은 짧지 않다. 그래서 시간의 의미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리고 각 에피소드의 강조점 또한 시간의 의미를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첫 번째 일화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의 의미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다음 사건은 살인자의 살해 동기에 관심이 집중된다. 세 번째 에피소드가 완성된 시간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면, 그 다음은 부조리한 상황들에서 무기력한 정부가 떠오른다. 즉 구조적으로 공연이 시작되면서 제시했던 시간의 의미를 추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들의 의미는 다음 장면을 통해서 이해된다.

 

관객의 시선이 집중되는 무대 안으로 사건들이 혼란스럽게 던져졌다.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 후, 두 사람이 나와 잡지를 한 장 한 장 찢으면서 많고 다양한 사건에 대한 정보와 그 의미를 던진다. 그들의 말이 빨라짐에 따라, 카톡, 카톡, 카톡, SNS의 효과음도 빨라진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가 더 빠른 속도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찢어지고 구겨진 잡지의 한 조각이 허공으로 던져져서 힘없이 떨어지듯이, 사건들은 시간 안에서 의미를 갖지 못하고 흩어진다. 이 행위들 앞에 전개되었던 사건들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 휘발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중들이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걱정했던 각각의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 안에서 대중들의 기억 밖으로 밀려났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정박되지 못하고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잊혀지지 말아야 했다. 대중들이 시간 안에서 망각해가는 사건들을 보여주면서 <시간의 난극>은 마지막 사건으로 나아간다.

 

이제 <시간의 난극>은 세월호 사건의 먹먹함으로 안내한다. 개를 돌보는 한 여인과 경비원에 관한 에피소드 후 조명이 완전히 꺼진다. 그 무대 위로 손석희 앵커의 목소리가 들린다. “침몰하는 배에서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까?” 구할 수 없다는 대답이 들린다. 그리고 침묵이 흐른다. 조명이 켜지고, 세 명의 배우가 나와서 무표정으로 계란을 무대 위로 던진다. 무대 위에 계란이 깨지면서 난장판이 된다. 304개의 계란. 던져진 계란은 힘없이 바닥에 부딪쳐 깨진다. 304명의 희생자. 기울어져 침몰해가는 배를 영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 영상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렇게 쉽게 부서진 계란은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희생자들이다. 계란이 던져지고 깨지는 모습을 보는 내내, 마음은 아리고 미안한 감정에 젖어 있었다.

 

어쩌면 침몰하는 배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 끝 장면 앞의 내용은 그런 아쉬움과 회한이 담겨있다.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어떤 집으로 개가 들어갔다. 그 개를 돌보던 아주머니는 경비원에게 들어가 꺼내오겠다고 말하지만, 경비원은 대답이 없다. 그녀는 경비원을 회유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경비원은 대답이 없다. 그러나 개 주인이 오고 급해진 그녀는 들어가 개를 꺼내온다. 경비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침몰하는 배에서 희생자를 구하는 것은 이렇게 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수많은 무전과 기다리라는 말은 공허했다. 그냥 들어가서 그들을 구해야 했다.

 

304개의 계란이 깨져버린 무대 위에 배우들은 사라졌지만,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연극 공연이 끝나면, 조명은 꺼졌다 켜지고 배우들이 인사를 하러 나온다. 그런데 무대 위를 밝히는 조명은 꺼지지 않고, 배우들의 인사도 없다. 그런데 객석등이 켜졌다. 관객들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며 수군거린다. “끝난 거야?” 여기저기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출입문이 열린다. 연극은 끝이 났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연극은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간을 살아야 하는 현실이 놓여 있다. 공연의 시간과 현재가 겹쳐진다.

 

이제야 어렴풋이 무대 배경 벽에 걸린 그림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 그림은 배가 출항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닭 두 마리 있는 그림이고, 마지막은 왕가(王家)의 모습이다. 이 그림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었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회적 사건은 예술가들 손에서 재구성되어 대중들과 만난다. 그 작품은 대중과 함께 그 사건의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고, 또한 불의에 분노한다. 세월호 사건은 이렇게 극화되어 관객과 만났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진상을 규명하고 있지만, 그런 해명이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해주지 못한다. 여전히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고, 심리 치료가 진행되고 있다. 예술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상처를 어루만지며 예술가는 이 사건을 애도한다. <시간의 난극>은 수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둔화시키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이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소환한다. 잊히지 않기를.




#저자 약력
정재우. 1968년 서울 생. 영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재직 중. doobee1@ifac.or.kr
글쓴이 : 정재우
작성일 :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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