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화두다. 한동안 인문학이 죽어간다는 소문이 급격히 확장되는 듯하더니, 최근 그 반작용인지 대기업, 사회단체, 도서관, 문화센터, 심지어 사적인 모임에서까지 너나없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강좌를 개설하네, 강사를 초청하네, 제법 떠들썩하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 붐은 연극계에도 불어, 서계동으로 자리를 옮겨 개관한 이래 <관객 학교>, <월요일 오후 다섯 시> 등의 인문학 강좌를 줄곧 개설해 온 국립극단을 비롯하여, 서울 및 수도권의 주요 아트센터와 극장들은 모두 앞 다투어 대중과 연극인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 및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확대하려는 추세다.

 그런 중 2013년 두산아트센터가 내세운 새로운 기획의 제목이 ‘두산인문극장’이다. 3월부터 약 4개월에 걸쳐 연극 상연, 강연, 영화 상영을 아우르는 기획이다. “두산인문극장 2013은 인간과 자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색하기 위해 ‘빅 히스토리’라는 큰 틀에서 천문학, 생물학, 지질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양한 학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프로그램으로 공연, 학술 및 교육 프로그램을 포괄하는 통합적인 기획이다”라고 그 스스로 밝히며, 3월에는 ‘Big Bang- 우주와 생명의 기원’, 4월에는 ‘Big Life-자연과 인간’, 5월에는 ‘Big Net-문명과 인류의 미래’ 라는 소주제 하에 역사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천문학자 등, 인문학을 넘어 자연과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통섭하는 강연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단순히 인문학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통합적 사고, 총체적 사고를 강조하는 기획이 퍽 참신하다.

 근대 이후 우리의 학문분야와 예술분야는 소위 ‘전문성’, ‘과학성’, ‘체계성‘이라는 기획 하에 세부적으로 흩어지고 말아서, 이제 예술학, 인문학 내부에서도 전문분야가 다르면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 예술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다. 그러나 근대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회, 윤리, 종교, 미, 철학, 언어, 역사, 문학, 자연과학, 기술 등은 서로 상이한 학문 분야로 갈라져 나갔고, 점점 더 개별 분과 안에서의 현상에만 집중하며 서로에 대한 관심을 잃어 갔다. 이제 전체를 보려는 시도나 세계의 본질과 불변하는 특질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무수한 현상과 무수한 분파로 분해되어 제 자신의 영역에만 관심을 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두산인문극장’의 기획은 반가우면서도 신선하다. 이름은 인문극장이지만 전통적인 인문학 분야인 문사철文史哲의 학자들보다 자연과학이나 첨단 이론에 관한 연구자가 더 많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위 장르 고유성이라 일컬어지는, 여타 예술 형식에 대해 갖는 배타적 특질에 집착하는 근대 예술에 대한 반성, 그리하여 예술 본연의 것이었던 세계를 바라보는 통합적 사고, 총체적 사고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 바로 그 시도를 ‘두산인문극장’에서 본다.

 그런데 막상 그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자니 뭔가 난처하고 곤궁하다. 기획의 야심만만함에 비해, 구체적으로 치고 나가 주어야 할 세부 주제가 궁색한 까닭이다. 이것은 개개 프로그램의 내용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강좌와 공연의 관계가 기계적이고 인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 간의 충돌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주제가 제대로 발생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당면한 구체적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연 프로그램’과 ‘공연 프로그램’을 묶어 주는 것은 표제어로 내세운 우주니, 인간이니, 문명이니 하는 키워드인데, 그 키워드가 제시하는 바가 상당히 광대하고 추상적이어서 그 아래 구성된 작품들이나 강연들을 다른 키워드 아래 배치했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다. 예컨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라는 부제가 붙은 ‘Big Bang’에 묶어놓은 오카타 토시키의 <현위치>는 다소 SF적 분위기를 지니고는 있으나 실제로 우주과학이나 생명과학적 주제와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공포에 직면한 인간과 인간사회의 속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가깝다. 카바레극 <우리는 죽게 될 거야>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Big Life’에 놓여있지만 다른 주제 아래 놓아도 크게 어색하지도, 또 그렇다고 딱히 어울리지도 않는다. ‘Big Net -문명과 인류의 미래’에는 이경성의 <서울 연습 - 모델·하우스>보다도 오카타 토시키의 <현위치>가 사실 더 어울린다. 이러다보니 주제는 주제로서 해야 할 몫, 즉 문제제기를 하거나 도발을 하거나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작품들을 이리저리 편의상(혹은 일정상) 나누고 적절히 배열하는, 기능적이고 수사적인 역할로 주저앉아 버린다.

 ‘두산인문극장’의 기획이 초점화되고 있는 지점은 ‘Big History’이다. 세 개의 키워드는 궁극적으로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하나로 통합하고 과학과 인문학을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아우르고자 하는 거대사^{Big History}의 창시자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의 이론에 가 닿는다. 아마 두산의 기획 역시 그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큰 듯하다. ‘Big History’라는 주제와 묶인 공연은 더그 라이트^{Doug Wright} 작, 강량원 연출의 <나는 나의 아내다>이다. 1인 35역의 모노드라마로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둘을 연결하는 것 역시 ‘역사'라는 단어에 대한 추상적 이해뿐이다. 137억만 년 전의 시간도 공간도 없던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인류 사회의 복잡계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며 당면하게 될 역치의 순간에 집단학습의 힘은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하는 시각으로 통찰하고자 하는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도와, 미국의 게이 작가 더그 라이트가 동베를린 출신의 흥미로운 인물 샤로테를 통해 바라보는 유럽의 역사, 나아가 20세기 인류의 역사에 대한 통찰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그저 ‘역사’라는 동일 단어 하나에 아슬아슬하게 선을 대고 있는 셈이다.

 모처럼의 참신하고 의욕적인 시도가 막연하고 추상적인 키워드에만 기대어 세부 프로그램들을 적절히 배열해 버림으로써 정작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산인문극장’이라는 그 첫 시도가 지니는 의미는 적지 않다. 적어도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연극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기획 자체만으로도 발생한 까닭이다. 또 기존의 표현 방식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들 공연을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점에 있어서 ‘두산인문극장’의 마지막 작품 <나는 나의 아내다>는 주목을 끈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샤로테 폰 마르스도르프^{Charlotte von Mahlsdorf, 1928-2002}라고 하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 샤로테의 삶은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20세기 유럽의 역사 그 자체이다. 소년이었던 샤로테는 나치 당원이었던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 그를 살해하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다가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소년원에서 도망쳤다. 공산화가 된 동독에서 여장남자로 살면서 1890∼1900년대의 가구, 축음기, 음반, 시계들을 수집하고 동성애자들의 비밀 아지트가 된 카페를 은밀히 경영했다. 그 후 통독된 베를린에서 ‘그/그녀’는 자신의 수집품으로 사립 박물관 그륀더자이트^Gruenderzeit를 연다. 통일된 독일에서 샤로테는 유명인이 되었고, 언론의 주목을 끌고 훈장도 받았으며, 미국인 작가의 신작 희곡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인터뷰도 하게 된다. 우리가 ‘샤로테’라는 흥미로운 인물에 접근하게 되는 것도 바로 미국인 작가 더그의 시선을 따른 것이다. 그러던 중 샤로테가 과거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스파이였으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감옥에 보내 죽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비난을 받게 된다. 더그 라이트는 그를 찾아가 무엇이 진실인지, 즉 그가 실제로 동독의 스파이였는지, 세간에서 떠드는 그 모든 풍문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묻는다. 그는 그 일에 대해 답변도 하고 변명도 하지만, 기록과 증언과 기억 사이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작품은 무엇이 진실인지, 기록과 역사적 사실로부터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그리하여 어떤 결론과 어떤 교훈을 정제해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역사보관소에 남아 있는 동독시절의 서류들, 더그 라이트가 인터뷰한 녹음들, 샤로테의 육성 고백들, 수집품들, 사진을 비롯한 개인적 기록들, 이 모든 것은 각각 샤로테에 대하여 상이한 증언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모순된 흔적이 모두 샤로테이다. 연극의 어느 부분에선가 샤로테는 자신의 수집품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구를 수리하지 않아요”, “모든 것은 보존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해요.” 그는 그것을 ‘지금은 광택이 사라진, 광택 있는 가구’로 설명한다. 모순된 그 자체, 분열된 그 자체, 바로 그것 그대로가 샤로테인 것이다.

 작품의 구성이 논리정연하고 일관된 서사를 추구하지 않고, 시공간을 오가는 에피소드들과 인터뷰, 사진이나 신문기사와 같은 객관적 자료, 수집품의 전시, 회고, 독백 등의 콜라주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자체’를 보여주고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한 인간의 선명성^鮮明性과 어떤 서사의 일관성이란 것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것인지, 사실과 진실은 얼마나 간극이 있는 것인지, 우리는 그것을 공연을 보며 느낀다. 명료한 언어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진실이 더 크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명료한 언어로 말하지 않는 것을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영토로 받아들인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런 문제제기를 힘차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연극이 할 수 있는 인문학적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