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연극계의 기수라 불리는 연출가 노다 히데키^野田秀樹, 58가 지난 6월 월드 투어 공연 차 한국에 왔다. 노다 히데키의 내한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공연은 지난 2005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를 통해 소개된 <빨간 도깨비>였다. 해안가에 표류한 남자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빨간 도깨비’로 불리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다룬 이 공연은 당시 국내 관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집단의 이기심을 우화적으로 고발한 이 작품에서 노다의 주특기가 드러났는데 바로 보편적 철학이 담긴 이야기를 빠른 속도의 놀이 혹은 웃음으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지난 7~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인 <벌^{The Bee}> 역시 노다 히데키 식 연극 만들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었다.

 <벌>은 현재 노다가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인 도쿄예술극장과 극단 노다·맵의 합작연극이다. 2006년 런던 소호씨어터에서 초연한 이래 도쿄, 뉴욕, 홍콩, 예루살렘 등에서 공연했으며 아사히연극상, 마이니치예술상, 요미우리연극상 그랑프리·최우수연기상·최우수연출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월드 투어 작품이기 때문에 극은 영어로 진행된다. 원작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쓰쓰이 아스타카^筒井康隆의 단편소설 <무시리아이^{Plucking At Each Other, 1974}>이며, 노다 히데키와 콜린 티번이 재창작했다. 노다 히데키는 연출과 극작 외에 이 작품에서 캐서린 헌터, 글린 프릿차드, 마르첼로 매그니 등 영국 출신 연극인 세 명과 함께 배우로도 출연했다.

 노다 히데키는 이라크 전쟁(2003)과 9.11 사태(2001)를 목격하면서 이 희곡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폭력과 테러, 복수의 연쇄 고리를 끊을 방법에 대한 노다의 모색과 고민이 공연 한 편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평범한 회사원 이도는 아내와 아이가 탈옥범 오고로의 인질로 잡혀 있는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된다. 기자들과 경찰이 몰려들면서 현장은 북새통을 이루지만 사건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사태 해결을 위해 결국 이도가 직접 나선다. 이도가 선택한 방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일형태의 보복이다. 이도는 오고로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시도한다.

 극의 메시지는 쉽고 분명하다. 노다는 폭력과 테러가 ‘자기에게만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잘 못하는’ 사람 본성의 확장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본성을 고치는 것은 어려우니 차라리 천성으로 받아들이되 최소한의 역지사지 정신을 발휘하라고 권유한다. 연극 <벌>은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라고 하는 대신, 타인을 적어도 폭력적으로 대하지는 말자고 권한다. 이런 관점은 다소 소극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겠으나 실제 공연을 보면 그런 의구심이 사라진다. 공연은 상당 시간을 할애해 제 아무리 정당방위일지라도 폭력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행위라는 것을 잔인하리만큼 반복해서 보여준다.

* 극단적 요소들의 공존

 연극 <벌>은 주인공 이도의 모습을 통해 일상과 폭력의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연극적 설정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연극적 설정이란, 바로 극단적 요소가 하나 안에 공존^共存하도록 하는 것이다. 평범하고 선량한 주인공 이도가 모종의 계기를 통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하듯, 작품은 극 제반의 구성요소들을 대상으로 삼아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한 데 엮어낸다.

 우선 장르부터 보면, 코미디와 비극이 한 데 뒤엉킨 모습이다. 극 초반, 관객은 황당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해 보이는 이도의 보복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이 보복은 이도와 오고로 중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는 치킨게임으로 변질되고, 점점 더 잔혹한 양상을 띤다. 이도의 편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해진다. 선량한 시민이었던 이도의 보복은 설득력을 점차 잃어가고 극은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피해자 이도와 가해자 오고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닮아갈 뿐이다.

 반복되는 피차 간 복수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켜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벌>에서 사용되는 주요 대도구와 소도구 역시 극단적으로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품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종이와 연필은 일상에서 흔히 보는 평범하고 친숙한 재료들이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잔인함을 상징하는 도구로 변환된다.

 종이는 이 연극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종이는 무대에서 벽채와 바닥을 이루는 재료일 뿐만 아니라, 무대 위 두루마리 형태로도 존재한다. 이도가 우여곡절 끝에 진입한 오고로의 집 장면 초반 부분에서 배우들은 벽으로 기능하던 종이를 오려 창문과 문을 내고 TV를 켜는 모습을 연출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보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종이 집은 참혹하고 잔혹한 공간으로 변한다. 집안에 놓인 두루마리 종이는 인질의 손가락을 담기 위한 봉투로 쓰이고, 피의 보복으로 점철된 종이 집은 극의 막바지에 이르면 아예 구겨져 버린다.

 연필의 경우, 처음에는 경찰의 무능함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경찰들은 책상머리에 앉아 연필을 깎고, 이 연필을 젓가락 삼아 끼니를 해결하며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이도가 오고로의 집에 역으로 침입하면서 연필의 의미가 달라진다. 빨간 색깔의 연필은 이도에 의해 하나하나 부러지며 인질의 절단된 손가락을 상징한다. 도구들이 이처럼 극단적 형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폭도 덩달아 커진다. 웃음에서 고통으로 이동하면서 관객은 감정의 양 극단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극단적 요소가 서로 엉겨 붙는 가운데 마침내 집안에 벌이 침입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무대 뒤편 영상을 통해 벌의 모습이 투사되면서 극의 메시지도 더욱 또렷해진다. 이 극에서 벌은 자기 방어 목적으로 벌침을 쏘지만 그로 인해 자신 역시 죽게 되는 가혹한 운명을 상징한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벌과 이도의 모습이 무대 위에 포개어지다가 파국의 정점에 이르면 종이 무대가 구겨지고 그 위로 수많은 벌떼가 엉겨 붙는다. 연극 <벌>은 자기 안의 폭력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인류를 향해 노다 히데키가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 악몽 같은 편지, 묵시록인 셈이다.

* 연극에 대한 탐구 - 실제와 놀이 혹은 현실과 환상 사이

 다소 교훈적인 메시지보다 극에서 더 인상적인 것은 순간순간 자유자재로 진행되는 연극적 놀이다. 노다 히데키는 자신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벌>에서도 놀이라는 방식을 통해 실제와 가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 이어간다. 없지만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만들어진 환상을 통해 실제 현실을 비춰보는 노다 히데키의 유희는 다름 아닌 연극 장르의 특성에 대한 탐구로도 볼 수 있다. <벌>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도 사실 줄거리라기보다는 이 연극적 놀이이다. 어느 순간부터 탈옥범이 펼치는 인질극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고 이도와 오고로는 서로를 향해 비슷한 형태의 보복만을 무한반복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지루하지 않다. 관객을 진짜와 가짜, 실제와 환상의 경계선에 앉혀 놓고서 각종 연극적 놀이의 향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극 초반 이도의 주변에는 고무줄 선^線이 등장하는데 이 선은 현대사회의 몇몇 의사소통 방식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이 고무줄은 납득할 만한 객관적 기준 없이 상황에 따라 이도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그가 보복에 직접 나서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무대에서 고무줄을 쥔 채 시민 이도 주변을 맴도는 이들은 공권력을 상징하는 경찰과 이슈를 쫓는 언론이다. 이 중 경찰의 소통은 겉으로는 이도를 위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이도와 사건 현장과의 단절을 목적으로 하는, 위장된 소통임이 드러난다. 경찰의 손에 들린 고무줄은 무대에서 사건 당사자인 이도가 현장에 들어올 수 없도록 막는 바리케이드 역할을 한다. 사회구성원 간 소통을 담당해야 할 언론 역시 허위를 일삼는다는 면에서 경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송기자의 손에 고무줄이 쥐어지자 이 줄은 마이크 선으로 기능한다. 무대 위 사건 현장에서 인터뷰를 따려는 기자들의 마이크 선이 어지럽게 얽히면서 동시에 이도를 얽맨다. 이런 식의 소통은 형식만 있을 뿐 실제 해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가짜 소통이며 허위일 뿐이라고 노다는 극을 통해 지적한다.

 주요 배우들이 성별을 바꿔 역할을 맡은 점도 눈길을 끈다. 주인공 이도는 영국의 여자배우 캐서린 헌터가 연기하고 탈옥범 오고로의 아내는 남자인 노다 히데키가 맡는다. 성 역할 바꾸기는 진짜와 가짜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 구별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적 장치이자 연극적 놀이가 된다. 특히 올리비에상^{Olivier Awards}을 수상한 캐서린 헌터의 남장 연기가 일품이다. 캐서린 헌터는 목소리 톤과 발성, 몸짓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주인공 이도로 완벽하게 분함으로써 관객을 진짜와 가짜, 실제와 환상에 대한 사유의 경계선으로 내모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영상의 활용방식도 주목할 지점이다. 이 연극에는 탈옥범 오고로가 자기 부인의 정조를 의심해 인질극을 벌이게 되는 과정을 그림자 영상으로 표현하는 대목이 나온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의심이 실제가 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고, 가짜가 진짜처럼 여겨지는 과정이 그림자 영상을 통해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 끔찍한 환상의 효과

 영상 속 그림자까지 드리우며 등장한 거대한 벌의 모습, 온 신경을 자극하는 벌의 윙윙대는 소리는 약 80분간 진행된 악몽의 정점을 찍는다. 연극 <벌>에서 체험한 생생한 연극적 경험, 무대를 통해 경험한 끔찍한 환상은 극장 밖에서까지 관객의 뇌리 속을 오래도록 맴돈다.

 공연 중 이라크 전쟁이나 9.11 사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공연이 이뤄지는 지역과 그 지역의 사람들이 현재 어느 정도 수위의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고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각도로 읽힐 수 있는 공연이다. 사회적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에게는 전쟁과 테러에 대한 풍자로 읽히겠지만,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치정극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공연을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벌>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함으로써 역으로 현실을 돌이켜보게 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래도 공멸을 부르는 보복은 피해야 하지 않겠냐는 원론적인 메시지가 설득력을 갖는 데는 연극 만들기에 대한 노다의 뚝심이 큰 역할을 한다. 줄거리 상으로 보면 사회에 대한 풍자나 비유에서 다소 단순한 면이 읽히는데도 불구하고 배우, 소도구, 대도구 등을 총동원해 연극적 놀이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강렬하고 꽉 찬 작품을 완성했다. 연극 만들기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철학, 노다의 재기발랄한 저력이 엿보이는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