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는 현실에서 부정되어야 하는 사항들을 부정함으로써 존재한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반대로 부정적인 것을 과포화 상태로 가지고 있어 문제를 야기한다. 현실에 없는 이상향에 대한 욕망이 유토피아적 표현으로 나타난다면, 디스토피아는 불행한 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통해 암울한 미래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자혜 작·연출 <디스 디스토피아>가 그리는 ‘디스토피아’가 이것을 소재로 한 기존의 콘텐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미래의 세계’가 아닌 ‘현재’에서 디스토피아를 찾았다는 것이다.

“다리 떤다고 엄마, 아빠에게 탁구 라켓으로 뺨을 맞은 그날 밤, 난 동네 전봇대에 기대어 서서 우유를 소주처럼 벌컥벌컥 마시며 휘파람을 불었어요.” 아이들은 동요처럼 이 구절을 반복하여 부른다. ‘불안’과 ‘억압’ 그리고 ‘저항’…. 디스토피아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익숙한 형태로 녹아들어가 있다. <디스 디스토피아>의 어른들은 그들이 ‘혁명’이라 믿는 무엇인가와 함께 증발해버린다. 어른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고추에 털이 난 채로 태어나고, 가슴에는 휴지를 넣고 허벅지를 면도칼로 그어서 생리를 하는 것처럼’ 다닌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거세된 현대의 젊은 세대를 상기시킨다.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곳에서는 아무도 섹스하지 않으니 수정, 착상된 아이들은 언저리 지대에 뭉쳐져 있을 수밖에 없다. <디스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무한 정지상태이다. 순환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세대 간의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순환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포츠로의 은유

무대는 시원하게 비어있다. 말끔한 경기장을 상기시키는 흰 바닥 위에 테니스 라켓을 기타처럼 잡은 아이가 부모를 구하는 노래를 시작한다. 아이가 부르는 노래는 ‘사춘기 따위로 신경 쓰이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일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등 일종의 ‘공약’ 같이 느껴진다. 필시 생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던 것이었을 진데, 이제 와 출생의 조절도 가능한 현재를 씁쓸하게 상기시키며 <디스 디스토피아>의 막이 오른다.

탁 트인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종횡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극이 진행됨에 따라 흰 바닥의 바깥은 곧 ‘언저리’이자 ‘죽음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계에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공간이다. 등장인물 각자의 개성은 드러나지 않으며, 세대별 대표성만을 가진다. 무대 위에는 지금의 ‘사건’만 존재하고, 관객은 전사(前事)를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한다. 거리를 두고 각 세대의 행태를 관찰할 뿐이다. <디스 디스토피아>는 이들의 모습을 주어진 규칙 안에서, ‘투쟁’과 ‘경쟁’하는 스포츠로 은유한다. 첫 번째 세대의 종목은 테니스, 두 번째 세대의 종목은 탁구, 마지막 세대의 종목은 복싱이다.

남자와 여자가 “선배!”, “후배!” 하며 보이지 않는 공을 쳐낸다. 열심히 라켓을 휘두르던 남자는 여자에게 공이 보이느냐고 묻지만, 함께 뛰는 여자의 맹목적인 믿음에 말문이 막힌다. 없는 공도 만들어 낼 듯한 기세로 뛰어다니던 그들의 몸짓과 숨소리는 점점 관능적으로 변하고, 비명에 가까운 여자의 기함소리와 함께 두 번째 세대가 경기장 안으로 입장한다(태어난다). 탁구 라켓을 쥔 그들의 눈에도 공이 안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들의 움직임은 앞 세대의 그것보다 덜 열성적이고, 관성적이다. 급기야는 침을 뱉듯 아이를 낳는다. 돌려보내어진 네 번째 아이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무대 위를 맴돈다. 보이지 않는 공을 쳐내는 몸짓은 투쟁을 의미한다. 실체 없는 것을 상대로 저항해야 했던 그들은 본능적으로 ‘연대’할 줄 알았고, 앞 세대의 보호와 통제 아래 자란 다음 세대는 영악하고 개인적이다.

가상세계의 현실적인 결말

<디스 디스토피아>는 공동체의 가장 작은 범위인 ‘가족’을 배경으로 상정한다. 그리고 혁명을 믿고 기다리며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공을 쳐내는 두 세대와 그것이 혁명이 아닌 ‘지진’이라는 것을 아는 마지막 세대를 보여준다. ‘다리 떨지 마라 복 날아 간다’, ‘휘파람 불지 마라 귀신 나온다’, ‘손톱 깎아 함부로 버리지 마라. 쥐가 먹고 사람이 된다.’ 그들은 납득할 수 없는 금기와 억압 아래에서 냉소한다. 디스토피아는 구성원들이 실제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 세계가 유토피아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인식의 강요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요한 토대를 이룬다. 표면적으로 이상적인 이 세계에서 불온한 생각이란 구성원들이 갖는 의문 그 자체를 말한다. ‘불온한 생각’으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보통 마지막 세대의 몫이었다. <디스 디스토피아>에서도 디스토피아물의 공식을 따르며 마지막 세대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이것으로 ‘전복’을 꾀하지 않는다.

<디스 디스토피아>가 더욱 디스토피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은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디스토피아의 유일한 출구인 ‘죽음’을 앞두고 아이들은 ‘지진(혁명)의 날’에 있었던 ‘가족식사’를 재연한다. 그들은 자신을 통제하던 앞 세대의 역할극을 수행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길을 잃은 아이들은 스케치북에 각자의 특기를 적고, 스스로를 디스플레이한다. 그리고 기성세대에 의한 간택의 손길을 기다린다. 기존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는 디스토피아물의 일반적인 해피엔딩을 뒤로 하고 낡은 책장을 넘기며 맥락도 없이 지난 세대의 흔적을 쫓는 모습으로 공연은 막을 내린다. 이것은 ‘지금’을 배경으로 한 가상세계의 현실적인 결말이다. 연대를 모르는 우리 세대는 실패할 줄 알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냉소는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우리를 잠식하는 것이 무엇인줄도 모른 채 시스템에 편입하고자 발버둥 친다. <디스 디스토피아>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믿는 ‘혁명’을 ‘지진’이라고 하고, 그들의 ‘실종’을 덧없는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의문을 갖게 된다. 저항하지 않는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능력이 있을까. 그날은 ‘지진의 날’이었을까. 그 것은 진짜 ‘혁명의 날’이 아니었을까.

경계하는 것

일반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에는 권위의 두 가지 층위가 존재하게 된다. 작품 내에 존재하는 권위와 작품 밖 작가의 권위가 그것이다. 기성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작품을 통한 다음 세대의 각성이다. 작품 속 젊은 세대의 투쟁은 부패한 시스템에 대항하는 순수한 행위로 그려지며, 이것이야말로 현실의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이다. 작가는 본인을 대신하여 싸워줄 젊은 세대를 독려하고 뒤로 물러나 그들의 저항을 관망한다. 그리고 속삭인다. 이것은 ‘너의 싸움’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작가의 권위와 또 한 번 싸워야 한다. 하지만 구자혜 작·연출의 <디스 디스토피아>에서는 두 번째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종용하고자 하는 디스토피아의 극복방법을 경계하고, 지금의 모습을 담는다. 그래서 <디스 디스토피아>는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