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놀라지 마라>(2009) 이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했던 박근형이 신작 <만주전선>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시켰다. 올해 초 남루한 삶의 처절함을 그린 <동백아저씨>로 일상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부조리의 속살을 날 것 그대로 펼쳐 보이는 ‘박근형다운’ 서사의 힘을 보여주더니 <만주전선>에 이르러서는 더 나아가 공연의 수월성까지 담보했다.

<만주전선>은 1943년 만주국에 모인 조선 인텔리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시대가 추구하는 인간형이 되려고 노력하는 조선 청춘들의 아이러니와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못한 친일 역사의식을 노골적으로 무대 위에 재현한다. 이 작품에는 박근형의 중심 화두인 가족, 사회부조리, 그리고 기독교 문제가 모두 포진해 있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을 해부하듯이 들여다봄으로써 사실주의의 환상에 가려져 있던 생경한 진실을 밝혀내는 일상극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그의 귀환이 반갑기 그지없다. 초연(6.13~29)의 관심에 힘입어 재공연(8.8~31)한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인물들의 자가당착과 허위의식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다.

노골적 풍자의 통쾌함과 섬뜩함

<만주전선>은 현재의 손자가 화자로 등장하여 일제강점기 말 자발적으로 만주에 유학했던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된다. 손자와 할아버지의 역할을 스카프의 유무로 구분하며 동일 배우가 연기하기 때문에 과거가 여전히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역사인식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육군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스카(김은우 분)를 축하하기 위해 의사 기무라(권혁 분)의 집에 친구들이 모였다. 문학청년 가네다(김동원 분)와 기무라 약혼녀 나오미(강지은 분), 아스카 동생 게이코(이봉련 분), 아스카가 연모하는 공무원 요시에(정세라 분)가 모여서 자신들의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창씨 개명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조선 이름으로 불리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 조선인을 ‘짐승’으로 비하하며, 독립군을 ‘비적’이라 욕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일본인으로 사는 것이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 경도된 이들의 정신과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작품은 “할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피는 아버지를 통해 내게도 흐릅니다. 그리고 이 땅 영원히 내 자손들에게도 대대손손 흐를 겁니다”라는 손자의 대사로 마무리된다. 아이러니한 인물들이 불러일으키던 웃음이 섬뜩한 현실인식으로 환치되는 지점이다.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생생하게 구축되었다.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가치관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자가당착과 허위의식으로 무장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성격은 진지함으로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한다. 가장 모순된 인물은 아스카와 요시에이다. 실존인물을 연상시키는 아스카는 비적을 물리치는 관동군 장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가 불륜으로 임신한 요시에와 결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나선다. 그는 신가요 가수가 되겠다는 게이코에게는 가문을 내세우며 ‘화류계 짓거리’라고 비난하면서 게이샤의 화려함에 일본 기녀가 되려고 했다는 요시코에게는 게이샤와 신가요 가수는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조선인을 짐승이라 비하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7대손’이라는 집안 족보를 내세운다.

인텔리 신여성 요시에는 일본인 상사와의 불륜으로 미혼모가 되어 버림받지만 자기 자식은 일본인으로 자랄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는다. 그러면서도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연인을 찾아서 일본으로 떠난다. 부도덕한 행위를 미화시키며 희생자로 자처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욕망으로 모성마저도 외면하는 인물이다.

문학청년 가네다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서구문학에 대한 경도로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갈매기」, 몰리에르가 쓴 희곡 중에 이런 게 있어.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 사창가를 휘젓던 여인 니나. 그때 문학청년 휘가로는 니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어설픈 지식으로 사실을 오도하면서도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해 부끄러움조차 없다. 만주를 ‘신천지’라고 일컫는 시집을 발간할 만큼 현실인식이 없었던 그는 당시 죄책감 없이 일제에 부역했던 문학인들을 연상시킨다.

기무라는 나오미와 만주에서 동거하며 슈바이처가 되기를 자처한다. 하지만 일본인 병원장의 데릴사위가 될 기회가 오자 거리낌 없이 나오미를 버리고 결혼하는 가장 속물적인 인물이다(기무라의 결혼은 초연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재공연에서만 설명된다).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지 못하는 것은 나약함과 나태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나오미는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지만, 역시 역사인식의 부재와 정치적 편향성으로 인종 차별적 구복신앙에 머무를 뿐이다. 이들은 요즈음 기독교에 대한 박근형의 비판적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게이코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역사인식은 전혀 없이 가족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이다. 당시 일반적인 민중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완성하는 데 가장 헌신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삶은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인물들의 우정과 배반, 꿈과 사랑을 통해 일본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일제강점기 인텔리 청년들의 욕망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유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물질 중심 가치관에 경도되어 과거는 잊고, 현재는 무시하며 물질만을 위해 분투하는 우리의 부조리한 삶에 대한 성찰도 요구한다. 과거의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 날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적폐’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와 조롱, 이 시대의 부조리를 향한 날선 비판은 적극적으로 관객과 소통된다.

뛰어난 연기 앙상블, 주제의식을 환기시키는 연출

이번 공연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었다. 인물의 이미지에도 적합한 캐스팅이 이루어졌으며,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연기력도 인상적이었다. 폭력적으로 과장된 아스카, 속물근성을 기독교로 은폐하는 기무라, 불륜조차 미화하는 요시에 등 인물의 아이러니를 진지하면서도 순발력 있는 연기로 잘 표현했다. 특히 천방지축이지만 책임감 있는 게이코를 연기한 이봉련과 왜곡된 종교인 나오미를 연기한 강지은은 웃음 속에 눈물이 담겨 있는 연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희극적 연기의 타이밍을 살리는 데도 뛰어났다.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여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던, 한 번도 조선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던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박근형 연출은 극적인 이미지를 생산하는 장면연출보다 인물의 성격과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연출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장치로 스톱모션을 쓰고, 인물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성극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인 과장으로 희화화시키는 정도이다. 하지만 결말에서 거대한 욱일승천기가 무대에 내려오면 등장인물들은 그 앞에 열 지어 서서 객석을 바라본다. 이러한 모습은 커튼콜 장면까지 이어진다. 극적 상황이 끝난 커튼콜에까지 마무리 장면이 계속되면서 주제의식이 확실하게 환기된다. 공연 내내 웃음이 넘치던 관객석에 비로소 현실이 틈입하며 우리가 여전히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섬뜩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이 단순한 장면으로 전체 분위기를 전복시키는 연출의 노련함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무대는 기무라의 허름한 자취방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탁자·의자·나무궤짝 등이 배치된 거실과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구분된다. 중앙 기둥에는 슈바이처와 일본천황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고, 무대 뒷면 전체에는 나무발들이 드리워있다. 공연은 무대 전체를 활용하여 진행되지만 솔직히 산만했다. 나무발의 쓰임새는 성극장면에만 국한되는데 뒷면 전체에 여러 개를 걸어두어 시선이 분산되었다. 무대에 집중하도록 정리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한다. 또 연출의 디테일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거실과 방을 높이의 차이로 확실하게 구분해 놓고도 거실에서 신발의 탈착이 통일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사소한 것이 전체를 흔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