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경찰서의 취조실을 떠올리게 한다. 겹겹의 창살, 온기 없는 철제 테이블과 의자가 보인다. 물컵과 물병도 차가운 스테인리스 재질이다. 극이 시작하면 두 남자가 이 취조실에 들어와 앉는다. 대니와 조이이다. 사건을 진술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관객은 사건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그렇게 객석에 앉아서 두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시카고 경찰인 두 남자가 역으로 사건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돌봐야 직성이 풀리는 대니. 그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동료 조이를 초대해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조이는 외로운 나날을 술에 기대 살고 있다. 대니는 자신은 잘 돌보지 못하면서 강박적으로 자신의 가정을 돌보려 하는 인물이다. 조이는 내심 대니의 가정이 부럽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창이 깨지면서 총알이 날아 들어왔고 대니의 아들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대니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사방이 온통 피야!’라고 소리친다. 이때 조명과 음악이 변화한다. 급박한 상황을 몸짓으로 표현하느라 격앙돼 무대의 앞쪽으로 나왔던 배우들은 뒤돌아 의자로 돌아간다. 이들은 이제 경찰의 집에 왜 총알이 날아들었는지, 이후 어떤 일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지는지 ‘말’하게 된다.

대니 역에 이석준과 문종원이, 조이 역에 이명행과 지현준이 더블 캐스팅된 이번 <스테디 레인>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겨우내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2007년 시카고 드라마티스트(Chicago Dramatists)에서 초연된 뒤 미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거듭해왔다. 2009년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대니 역에 휴 잭맨이, 조이 역에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캐스팅됐다. <스테디 레인>은 철저히 배우 두 명의 힘으로 굴러가는 극이다. 모든 대사에 사건의 단서가 되는 정보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터라 관객들은 들은 ‘말’을 곧바로 상상의 영역으로 옮겨 재정렬한다. 배우들의 몸짓도 사건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니가 포주 월터와 격렬한 싸움을 벌일 때나 -월터는 대니가 창녀 론다의 뒤를 봐주는 게 못마땅하다- 조이와 대니가 순찰 중에 약에 취한 베트남 소년과 만나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온몸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묘사해서 당시의 상황을 전달한다. 한 백인 남자가 나타나 소년을 잘 돌봐주겠다며 데려갈 때 대니는 자신의 다리에서 소년을 ‘뜯어내듯’ 떼어냈다며 손짓한다. 베트남 소년의 말을 통역이라도 해서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이의 말은 듣지 않았다. 소년은 이후 살해된다.

대니와 조이는 머릿속에 자신이 겪은 일들이 계속 떠오르고 반복되고 있다는 듯이 읊조린다. 극은 사회의 악과 늘 직면해 온 두 명의 경찰관이 비에 젖듯이 악(惡)에 젖어가는 상황을 그린다. 사건전개는 복합적이다. 끊임없이 말하면서 사건을 다시 통과하는 인물들의 심리는 불안정하다. 배우의 말을 통해서만 극이 전개된다는 특성 때문에 시카고의 지역적 특색이나 인종 문제와 같은 정보들은 한 번 들어서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공연기간의 초반에는 배우들이 대사의 내용을 또박또박 잘 전달하려 애쓰면서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느라 바빠 보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이명행이 연기한 조이는 차분했다. 차분하게 설명하듯이 극이 흐르게 한다. 모직코트와 얌전한 머리가 그런 성격을 강화한다. 반면에 이석준이 연기한 대니는 활화산 같다. 고저가 분명하다. 가죽 재킷과 위로 올려 빗은 머리가 그런 성격을 도드라지게 한다.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대니의 머리는 산발이 된다. 그의 심정처럼 말이다. 조이가 시종일관 차분해서 배우 이명행이 연기 중에 강약조절을 좀 더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반전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시점 -즉 지금껏 조이와 함께 진술해 온 대니가 실은 이미 자살하고 없다는 정보가 드러난 때-을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조이가 친구를 잃은 충격 때문에 자기 감정을 억누른 채 진술한 것이거나 일부러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유약한 지식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외양 때문에 이명행의 조이는 대니의 가정을 차지한 의뭉스럽고 전략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했다. 이명행, 이석준의 <스테디 레인>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이미 과거의 일이고 조이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고 있다는,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환기시켰다.

지현준이 연기한 조이와 문종원이 연기한 대니는 또 달랐다. 이들의 연기는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배우들은 비에 젖은 것처럼 역할에 충분히 젖어 있었다. 재밌게도 이전 팀과는 반대로 조이가 가죽재킷을 입었고 대니가 모직재킷을 입었다. 검은 가죽재킷의 주머니에 연신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움츠렸던 지현준은 의기소침한 조이를 만들어냈고 성실한 사람이 입을 것만 같은 모직재킷을 걸친 문종원은 거칠면서도 속은 여린 대니를 만들어냈다. 이 두 배우는 특히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에 몰려서 판단력을 잃고 악에 물들어가는 인물들을 부각시켰다. 여기서 악에 물든다는 건 단순히 악행을 저지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악마성에 흡수되어 가는 인간. 그들에게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시간이 온다. 이야기 자체가 어두운지라 공연의 분위기는 물먹은 솜처럼 점점 처지지만 배우들의 몰입한 표정이 관객들을 잡아끌었다.

사건 전개가 워낙 중요한 작품이라 아래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윌리와 월터 형제의 에피소드는 베트남 소년과의 만남에 앞서 나오면서 복선처럼 기능한다. 포주 월터와 그의 어린 동생 윌리와 싸우면서 대니는 다리를 다친다. 베트남 소년을 만났을 때 대니에게는 이미 그 또래 소년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각인된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의 다리에 들러붙은 베트남 소년이 위기에 처해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배제했을 것이다. 소년이 살해된 후 대니는 윌리가 운전하는 르망 자동차를 뒤쫓는다.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가서 마치 ‘악마의 눈깔’ 같다고 표현하던 그 르망을 뒤쫓아 경찰관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할만한 건수를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윌리가 자기 품안의 강아지를 보호하려는 걸 총을 집으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두 소년 모두 대니 때문에 죽고 만 것이다. 사건은 대니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조이가 재구성해 발화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이는 대니의 자살을 묵인하고 대니의 가정을 책임지기로 했다. 조이는 서서히 대니가 되어간다.

조이의 기억 속에서 이야기가 가장 극적으로 재구성되는 때는 바로 조이가 대니의 아내 코니와 같이 자고 난 다음이다. 번개가 치는 순간 문 앞에 선 대니를 본 조이. 그러나 이것이 조이의 현실인지 그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때 거기에 서 있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조이 앞에서 대니는 아프고 쓰게 웃는다. 그런데 이 순간의 대니 역시 조이의 망상 속 인물일 수 있다. 대니가 이미 자살해버렸다는 정보가 밝혀진 이후 이 이야기는 조이에게 현실일까, 망상일까. 망상이 그의 현실을 침범한 상황에 이르렀나. 조명이 섬세하게 변화한다. 그래서 무대 벽에 둘의 그림자가 크게 번진다. 이 둘의 관계야말로 악하다. 대니와 조이는 서로에게 그림자로 기능하는 인물들이다. 이렇듯 중요한 변화의 지점에서만 빛과 소리의 효과를 쓰는 등 김광보 연출에게서는 절제하는 진중함이 엿보였다.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내용을 잘 전달하려 한 성실함이 느껴지지만 역으로 한 군데에 배팅하는 과감함은 없어서 아쉬웠다. ‘느와르’라는 장르적 성격 때문에 <스테디 레인>이 어디선가 이미 본 듯한 익숙함을 주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극 안에 배치된 현실과 허구의 관계가 극장 밖의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생각하면 끝까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키스 허프의 이야기는 한국 무대에 도착해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차원에 머물렀고 남은 건 결국 배우이다.

이미지 제공_충무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