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늦잠을 잔 탓에 등굣길은 더욱 멀었다. 여느 날과 달리 거리는 텅 비었고, 네거리 모퉁이에는 장갑차 몇 대가 열 지어 서 있었다. 뒤늦게 들어선 교실은 처음 장갑차 실물을 본 친구 녀석들의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광주에서 출퇴근 하시는 선생님들은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임시휴교가 결정되었으니 귀가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예정에 없던 휴교는 벼락같은 선물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와 동네 어른 몇 분이 모여 광주에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이튿날 하늘에는 헬기가 날았다. 어머니는 다짐받듯이 외출을 금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고 이웃집 대학생 형과 이제 막 제대한 또 다른 형이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김대중(金大中, 1924~2009)이라는 이가 북한의 조종을 받아 난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형들의 실종 사건의 배후로 더해졌다. 하지만 두 사건의 내막을 납득할 만큼 확신을 가지고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한참 뒤 공수부대를 제대한 형이 심한 고문을 받고 돌아와 몸져누웠다는 소식과 공수부대원들이 처녀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 죽였다는 풍문이 마을 전체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내 고향 담양에서 겪은 1980년 5월의 기억이다.

 노순택의 <망각기계展>은 사진으로 기록한 그날의 후일담이다. 학고재갤러리 신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2005년 5·18기념재단에서 추진한 ‘5·18기념공간’에 관한 사진작업자 공모에 선정된 작가가 6년 남짓한 시간 동안 촬영한 60여 점의 작품을 내걸었다. 망월동의 옛 묘지 풍경, 시간에 씻긴 영정사진들, 그리고 화순 운주사의 미륵불 등이 등장한다. 사진 기록 작업이 기억이 아닌 망각이라 생각하여 역설적이게도 ‘망각기계’라는 전시명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 실체를 확인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부서진 영정사진들은 숱한 세월 바람과 비에 깎이고 문드러져 누운 운주사의 미륵불을 닮아 있거니와, 노순택은 거기에서 망각기계로서 사진의 배반을 목도했을 터이다.

 하여 노순택의 작업에서 5·18은 시각적 이미지가 거세된 이야기로 환기되고 있다. <망각기계 (Forgetting Machines)Ⅰ_황호걸>은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한다.

“황호걸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소아마비를 앓는 형의 다정한 말동무였다. 빛고을에 계엄의 피바람이 일자 호걸은 친구들과 함께 도청에서 시신 닦는 일을 자처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황호걸이 닦았을 시신 중에는 또래 양찬근도 있었을 것이다. 
 “양창근은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되었다. 형들이 외쳐대는 민주화가 무엇인지, 전두환이 무엇을 어쨌기에 몰아내야 하는지 알지는 못했다. 창근에게는 죽어가는 친구와 형들의 모습만이 진실이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군부독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시위대에 합류했다.”    

 기억은 서사이다. 선혈이 낭자한 사자의 얼굴도, 그들의 비명과 외침도 기계는 온전히 기록해내지 못한다. 이야기만이 진실의 보루로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서 부활할 따름이다. 역사는 바로 그 서사의 외피를 두를 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허구이든 사실이든 우리는 서사의 기억으로 역사와 접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은 늘 지금 이 순간이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역사를 어떤 풍경 속에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가?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뉴스와 이미지 제작 판매에 열을 올리는 미디어, 환한 미소로 그 자리를 빛내는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이 펼칠 수 있는 한편의 블랙코미디의 공모자로 살고 있지 않은가.

 노순택은 손상된 시각 이미지에 서사를 결합시킨다. 오래된 초상만으로는 그날 이후 사자들이 겪은 오욕의 시간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서였으리라. 순간 사자들의 그 사연에 우리들의 비굴한 얼굴이 고스란히 비친다. 사족으로 붙은 이야기는 차라리 구차스럽다. 작가 노순택이 이렇듯 촌스러운 미학을 통해 던지고자 했던 질문은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오월 광주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기억과 망각이 어떤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그의 이 물음은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남은 우리 자신을 향해 있다. 되받아 다시 쓰건대, 역사라는 이름의 허울을 쓰고 그날의 비극을 감상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연민의 과거에 취해 있는 건 아닌가? 혹 그도 아니라면 위정자들의 삼류 정치 쇼에 집단 엑스트라로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질타이다. 이 준엄한 경고를 통해 노순택은 그날의 오월이 아닌 오늘의 오월을 이야기한다. ‘어찌 역사가 소비의 대상일 수 있으랴?’ 라는 반문과 함께 말이다. 카메라 뒤에 숨어 포르노그라피를 탐하는 자의 시선으로 5·18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우리의 관음증을 향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