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에 나오는 익명의 인간과 사물처럼 오원배의 작품은 모두 무제(無題)이다. 전시는 대형 그림, 북커버에 그려진 소품, 프레스코(Fresco)화1 등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 구성된다. 종이에 그린 대형 그림에는 어두운 바탕을 배경으로 중심을 잃은 채 떠도는 거대한 인체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마치 공기가 주입된 인형처럼 보인다. 한편 떠있는 인간들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것은 바닥에서 솟은 식물이다. 동물의 생식기처럼 보이는 식물의 날카로운 형태는 거세된 무성적 인간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주변의 공간을 그대로 투사하는 인간들은 바닥없는 심연 속으로 던져진 주사위처럼 추락한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고뇌에 찬 인간의 등 뒤에는 숫자가 새겨진 계단과 인간을 공격하는 듯한 구조물이 놓여 있다. 이처럼 아무런 질서 없는 숫자와 어디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은 인간이 대면한 세계를 암시한다. 구조물들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것은 금관악기 연주자이다. 마치 예술만이 이 공허한 우주를 채워주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회화가 공허와 공포에 젖어 있다면, 고풍스런 북커버에 그린 그림과 프레스코화는 세밀화나 잘 정련된 보석 같은 소우주적 밀도를 가진다. 열리지 않는 책뚜껑이라는 형식은 비밀스러운 세계의 입구 같은 느낌을 준다. 북커버에 그린 그림의 소재는 대형 회화의 모티브를 변주한 것으로 건축물 및 그와 대치되는 인물, 식물 등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수수께끼는 대형 회화작품처럼 위협적이기보다는, 즐거움을 줄 수도 있는 미지의 형상을 지닌다. 패널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작은 스케일로 통일적인 형식을 띤다. 밀집된 건축물들은 소실점이 일관되지 않은 기이한 원근법과, 삶의 흔적이나 인적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레스코화의 상대적인 안정감은 부동의 시간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되찾은 시간, 즉 종교에 비견될 만한 절대적인 근원의 시간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 의하면 예술작품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펼쳐져 전개된 시간, 즉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 잃어버린 시간과는 대립되는 시간이다. 여기에서 예술작품은 비물질적인 장소나 풍경을 감싸며 세계의 시작을 구성한다. 반면 오원배의 회화작품에서 허공에 매달린 인간을 압박하는 어두운 배경은 삶과 죽음 사이의 실존적 시공간이다. 그들이 걸쳐있는 심연은 자유와 초월의 공간인 동시에 방황과 전락의 공간인 것이다. 어둡고 경직된 인간의 표정은 불행한 상황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또 다른 정착지를 찾지 못했다. 벌거벗겨져 홀로 떠있는 인간들에게 타인과 기계적 구조물은 서로 겉도는 존재이다. 결국 숫자나 계단 등으로 나타나는 진보에 대한 환상도 소유하지 못한 채 겉돌 뿐이다. ‘삶에 대한 의식은 곧 삶의 불행에 대한 의식’(헤겔)이며, 이 지점에서 실존이 시작된다. 오원배의 작품에 나타나는 실존적 인간은 그들의 단말마적인 외침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비어있는 우주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무력감 속에 있다. 뒤죽박죽 상태의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며, 그것은 인간을 해방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수인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비교적 긍정적 색채를 띠는 소품 속에서 작가는 혼돈상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광명한 이성이 아닌 기호임을 보여준다. 오원배는 관객에게 사랑과 광기, 죽음으로 점철된 어둠의 전조인 기호를 만나게 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1964)에서 추상적인 지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는 기호들에 압박당하고 그 기호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띠는 지성, 자신을 질식시키는 공허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띠는 지성이 문제이다. 수수께끼처럼 명멸하는 기호들은 관객에게 우연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무엇을 드러낸다. 즉, 우연히 나타나 해석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기호이다.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정신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원배의 소품이 텍스트의 형태를 가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대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미지의 기호들은 투명하게 소통되지 않고, 침묵 속에서 해석을 요구한다. 사물도 정신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우주에서 히스테릭한 몸짓을 하고 있는 인물들 역시 관객이 계속해서 해독해야 할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