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라서, 스쳐 지나가다 본 포스터가 맘에 들어서 일수도 있고 신문이나 뉴스에서 좋다고 하니 가볼 수도 있다. 전시를 보는 것이 숙제라서 전시장을 찾는 학생들도 많다. 그렇다면 미술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전시를 만드는 것이 일이고 전시를 보는 것이 또한 일인 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은 아는 사람이 기획해서, 혹은 아는 작가의 전시라서 의무적으로 전시를 보러 가는 경우들도 많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술계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전시를 자주 보지 못하는(않는) 작가나 기획자도 많다. 전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서 혹은 게을러서 등,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런 그들도 바쁜 시간을 쪼개 찾는 전시들이 있다.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전시’라는 생각이 촉수에 걸리면 일단 전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얼마 전 강남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있었던 <텍스트/비디오/여성-1960년대 이후의 미술展>은 그런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제목의 전시였다. 현대미술에서의 주요 키워드인 ‘텍스트의 차용’, 그리고 ‘비디오라는 매체의 실험’, 그리고 ‘여성주의 미술’을 한자리에 어우르는 전시를 표방했다. 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서 하는 기획전시도 쉽게 시도하지 않는 ‘1960년대 이후의 미술’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과연 갤러리에서 이런 전시가 가능할까라는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참여 작가군은 제목에 걸맞게 쟁쟁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 마틴 크리드(Martin Creed),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댄 그래햄(Dan Graham), 온 카와라(河原溫), 폴 맥카시(Paul McCarthy), 부르스 나우만(Bruce Nauman), 백남준(1932~2006),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에드 루샤(Ed Ruscha),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 전시가 아니라면 국내 기획전시에서는 만나기조차 쉽지 않은 작가들이었다. 갤러리 전시가 갖는 한계를 인정하고 간다면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만 하리라고 애써 기대를 줄여가며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스크를 한 간호사의 음산한 시선과 마주친다. 리처드 프린스의 <세컨드 챈스 너스Second Chance Nurse>(2003). 리처드 프린스는 대중매체에 의한 사진을 다시 촬영해서 미국의 대중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업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간호사 시리즈는 뉴스 가판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소설표지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소설의 표지를 스캔하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로 옮긴 작업들이다. 커다란 캔버스로 옮겨진 소설의 표지구성과 타이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다소 도발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이기도 한 간호사의 모습은 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간호사 시리즈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세컨드 챈스 너스>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전시장을 향한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작품 외에도 이 전시에는 볼만한 작품들이 꽤 있었다. 백남준의 <네온 TV: 천국과 이승(Neon TV: Heaven and Earth)>(1990)와 <비디오 샹들리에 X(Video Chandelier X)>(1991), 트레이시 에민의 <노 모어 워킹No More Walking>, 루이스 부르주아의 <니들 우먼Needle Woman>(1947~1949) 등. 그런가하면 작가이름은 대단하지만 그들의 대표작이 아니어서 관객을 맥 빠지게 하는 작품들도 있었다. 개별작품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나, 거대한 주제 안에 놓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제자리를 찾지 못해
어정쩡한 모습으로 관객을 맞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 기억해보니 개별작품들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생각했던 뭔가 새로운 색다름, 혹은 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전시장을 나서는 마음이 마치 큰 과자봉지를 선물로 받아 열었는데 정작 ‘맛있는’ 과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들어 있었을 때 느끼는 그런 실망감 같았던 것은. 하지만 누군가 전시 전반에 대한 느낌을 말해달라고 하면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발품이 헛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전시 자체가 아니라 작가들의 개별작품을 만나려는 마음으로 갔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기분 좋게 전시장을 나섰을 것이고 몇몇 작품들이 더 마음에 와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시를 보러 가는 이유가 다양한 것처럼 전시를 본 다음의 느낌과 이야기도 각각 다른 법이니까. 누군가는 그렇게 기분 좋게 전시장을 나섰을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