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인천 근교의 한 폐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거리에 어지럽게 내걸린 각종 현수막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아마도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곳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공적인 채널을 통해 알려준 그 폐가를 기웃거리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빈방에서 저 홀로 돌아가는 선풍기와 어둑한 실내를 희미한 불빛으로 감싸고 있는 전구가 그 집을 폐가가 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듯했다. 마치 폐가가 되면서 함께 멈췄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동 30번지’, 바로 양혜규 작가의 외조모가 살던 집이다.

이 작업에서도 그렇지만 어떤 장소, 그중에서도 가급적 작가의 개인사와 연관된 장소,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장소, 그곳에서 부는 바람과 조명과 시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작용이 불현듯 떠올려주는 회상, 기억, 환기가 이후 작가의 작업 언저리를 맴돈다.

이를테면 작가는 <쌍과 반쪽-이름 없는 이웃들과의 사건들>에서 자신의 고향인 아현동 재개발 지구를 찍은 영상과 자신이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바 있는 베니스비엔날레 주변 경관을 찍은 영상을 대비시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한다. 그리고 <서울근성> 시리즈에서는 형형색색의 휴대전화 장식물로 치장한 설치작업 <서울 멋쟁이>, 각종 의료용품으로 뒤덮인 <약장수>, 온갖 청소도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씻고 닦고>, 플라스틱 조화로 장식된 <자투리 정원>, 그리고 빨래 건조대를 소재로 마치 체조라도 하듯 다양한 몸짓을 흉내 낸 일련의 흑백사진작업 <접힐 수 있는 것들의 체조>, 근대생활사의 아이콘이라는 관점으로 본 평상을 소재로 한 사진작업 <평상의 사회적 조건> 등을 통해 근 십 년 이상 떠나 있었던 서울의 달라진 풍경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서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hommage)에 해당하는 작업들에서 작가는 진정성에 이르지 못하고 겉도는 소통을, 건강과 위생에 대한 강박을, 조화를 통해서나마 자연에 대한 상실감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서울 사람들의 생활사를 코멘트한다.

또한 자신이 베를린(Berlin) 집에서 사용하던 라디에이터를 이용한 설치작품 <만토이펠 거리 112>에서 작가는 자신의 현지 집 주소를 제목으로 차용한다. 아마도 집에서의 열과 따뜻한 온기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가 작업의 주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일상적으로 쓰던 각종 집기를 재구성해 놓은 설치작업 <생 브누아가 5번지>에서 작가는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가 살았던 집 주소를 제목으로 붙여놓고 있다. 그 집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의 남편인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가 살았던 집으로, 뒤라스의 문학가로서의 배경과 앙텔므의 레지스탕스로서의 전력이 맞물려 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가 되고 있다. 그 장소의 특정성이 작가의 인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뒤라스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에 해당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풀어낸다.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 작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태생으로서 뒤라스의 이중적 소외감-이를테면 프랑스인에도, 원주민에도 전적으로 속해져 있지 않은-에 공감한다. 특히 자신의 언어를 결코 설명적이고 지시적인 의미로 환원하지 않는 뒤라스 글쓰기의 특정성에 공감한다. 서울과 독일을 오가는 자신의 처지와 그 처지가 만들어준 작업의 생리가 뒤라스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업을 계기로 이후 뒤라스에 대한 오마주를 작업으로 풀어낸 것이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시리즈다. 그 시리즈의 일부로서 <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셋’은 작가 자신과 뒤라스, 그리고 익명적 주체(아마도 관객)와의 관계를 의미하며, 다르게는 뒤라스를 만나기 전의 작가와 뒤라스를 통과한 작가, 그리고 관객과 만나는 작가, 이렇게 작가의 세 아이덴티티 층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선풍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해 일렁이는 블라인드와 그 블라인드와 빛(조명)이 반응하면서 만들어낸 그림자 진 공간을 연출한다. 그리고 여기에 히터에서 나오는 열과 분사기에서 나오는 각종 향이 더해진다. 그 연출된 공간 속을 거닐면서 관객들은 바람과 빛과 열과 향에 반응하고 시각과 청각(마이크를 통하는 음성에 따라 조명이 변한다), 후각과 촉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일종의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집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 누군가의 마음속을, 추억과 회상 속을 거닐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때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엿보고 있다는 느낌(관음증?)에 사로잡힌다. 여기서 블라인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는다. 열려져 있으면서 닫혀있는, 연결되어 있으면서 단절된 관계의 이중성, 모호성이 작가의 작업생리와 통한다.

그리고 작가는 뒤라스의 소설 「죽음에 이르는 병The Malady of Death」(1986)을 직접 각색하고 연출한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린다. 작가의 작업은 작가의 뒤라스 읽기-자신의 언어를 결코 설명적이고 지시적인 의미로 환원하지 않는다는-로부터 캐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진정한 것들은 언어와 언어 사이, 의미와 의미 사이에 놓여있고 의미로 박제화 되지 않으면서 무의미에 빠지지 않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로부터 생성된다. 작가의 작업은 그 의미를 개인사로부터 캐냈을 때 공감 역시 커진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전시장 내부

이미지 제공_ 아트선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