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희자는 한국만화사에서 순정만화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녀 취향의 감성적 작품이나 순정을 타이틀로 내세웠던 만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념의 순정만화는 엄희자를 정점으로 출발했다. 엄희자의 작품에는 구슬처럼 빛나는 눈과 뾰족한 코, 풍성한 금발의 미형 캐릭터, 환상적 사랑과 호사스런 삶에 대한 갈망, 이를 극대화해서 표현하기 위해 화면을 가득 채웠던 꽃과 물방울 등 장식적 요소, 분절된 시공간을 하나로 묶어서 의미를 전달하는 몽타주 기법 등 순정만화를 대표하는 모든 상징이 나타난다. 물론 이 같은 작화 기법은 일본 만화의 신(神)이라고 불리는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蟲, 1928~1989)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희자 만화에는 그녀만의 삶과 상상력이 담겨 있다. 현재도 로맨스소설이나 TV드라마의 전형적 플롯(plot)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열한 사건들의 구조으로 활용하는 주인공의 기억상실증, 기시감(旣視感), 데자뷰 태생이 다른 쌍둥이, 사고로 인해 뒤바뀐 운명 등의 서사적 요소가 그것이다. 엄희자는 급속한 산업화로 몸서리치게 고단했던 시절, 더 나은 환경을 바라며 또 다른 자신을 꿈꾸던 소녀들의 욕망을 대변한 작가였다.

이번에 발행된 작품집에는 엄희자의 등장과 한국 순정만화의 시작을 알린 데뷔작 『행복의 별』(1964)이 수록됐다. 이 작품은 스승 조원기가 구성을 도와 이후의 어떤 작품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다. 대강의 내용은 유복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유미 앞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외국소녀가 나타나고, 고대 이집트의 왕녀상(像)에 얽힌 이야기로 구성된다. 특히 작품 곳곳에 아르누보(Art Nouveau) 1890~1910년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예술 양식풍의 일러스트를 배치해 작품의 서사적 분위기와 판타지적 공간을 구성해낸 점이 돋보인다. 또한 독립작품 격인 『공주와 기사』(1965), 동화 『왕자와 거지』를 모티브로 한 『귀족의 딸』(1967), 장식적이고 감성적인 작화 요소를 배제하고 정적인 서사 전개에 집중한 『G선상의 아리아』(1972)가 수록됐다. 『엄희자 컬렉션』은 작가의 창작 스타일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였기 때문에, 서양 명작을 각색한 최고의 인기작으로 평가받는 『네자매』, 루이자 메이 올콧(Louisa May Alcott, 1832~1888)의 『작은아씨들Little Women』(1868~1969)을 각색 『카치아』,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e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의 『대위의 딸Kapitanskaya Dochka』(1836)을 각색 『긴다리아저씨』진 웹스터(Jean Webster, 1876~1916)의 『키다리아저씨Daddy Long Legs』(1912)를 각색 등이 수록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엄희자는 194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도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가장 역할을 담당하며 만화를 배웠다. 데뷔 후에는 스승 조원기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고 그 스승과 결혼해서 최고의 만화가 커플로 살았다. 그러나 남편의 종교 문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에서 온 천재작가라는 별칭으로 애니메이션 회사에 근무하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조원기의 아내 조희자로 살고 있다. 희생을 감수한 선택이었을까?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해석하고 싶다.

朴錫煥 1973년 전남 무안생. 만화평론가, 월간 <G-life> 편집위원. 최근 저서로 『코믹스 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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