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러시아미술을 처음 접한 것은 1996년이었다. 그때 나는 위대한 미술작품 앞에서 충격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는다는 소위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감동과 충격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한국에서 미술과 크게 인연이 없었던 내가 러시아어 알파벳(Russian alphabet)도 모르고 갔던 그곳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트디렉터로 일을 하고 있다. 지금 예술의전당에서 개최 중인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展>은 낯선 곳에서 첫사랑을 재회한 듯한 감동과 설렘을 다시 안겨주었다.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828~1910)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와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v, 1873~1943), 볼쇼이발레단(Bolshoi Ballet) 등 러시아 예술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미술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이번 전시는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he State Tretyakov Gallery)에서 엄선된 19세기의 이동파(1) 그림과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선보임으로써 그동안 신비에 가려져 있었던 러시아 미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오랜 농노제의 존속과 강고한 차르(tsar)제정 러시아 때 황제(皇帝)의 칭호 통치라는 비민주적 상황이 오히려 러시아 예술 전반에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각인시켰다. 모든 장르의 러시아 예술을 관통하는 것은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이었다. 러시아 미술에는 서구의 다른 미술에서는 볼 수 없는 스케일 큰 인간적인 감동이 담겨있다.

  전시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역사화, 아방가르드 등 장르별로 친절하게 러시아 미술을 일별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 있었다. 어떤 그림에서이건 “진실한 삶”에 대한 작가들의 열망이 전시장을 진지하게 만들고 있었다. 러시아 초상화는 인물의 외적인 묘사뿐 아니라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는 심리적인 묘사로 정평이 나있다. 이번 전시에는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l, 1809~1852), 네크라소프(Nikolai Alekseevich Nekrasov, 1821~1878)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문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이 그린 톨스토이는 소박한 농민복을 입고 영지의 숲에서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했던 위대한 사상가 톨스토이의 풍모를 보여준다.

  19세기말 러시아 문화를 주도했던 것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같은 위대한 문인들이었다. 이동파라는 이름으로 결집한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은 이들 문인들의 영향으로 러시아 화가들은 세계 최고의 풍속화가들이 되었다. 탁월한 재능으로 그들은 민중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렸다. 마소예도프(Grigoriy Grigoryevich Myasoyedov, 1834~1911) 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에서는 신랄할 사회풍자가 담겨있으며, 보그다노프 벨스키(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1868~1945)의 <암산>은 유머스러운 한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풍속화를 역사화의 경지로 끌어올린 레핀의 역작 <볼가강의 배끌기>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작은 에스키스(esquisse)작품 제작을 위한 밑그림이 큰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작은 종이나 천에 간단한 구도를 그려 보는 일의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진실한 삶에 대한 열망’은 척박한 러시아의 자연을 아름다운 풍경화로 변모시켰다. 사브라소프(Alexei Kondratyevich Savrasov, 1830~1897)와 레비탄(Isaak Il'ich Levitan, 1860~1900) 같은 러시아 풍경화의 대가들의 그림에서는 나무와 숲 사이로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나온다. 전시의 말미는 러시아 미술을 세계미술사의 중요한 위치에 각인시킨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현대 추상미술의 한 장을 연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중요 작품들이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혁명을 앞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들은 작가들로 하여금 추상 미술로 단숨에 도약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현실은 불우했다. 그러나 이 현실을 예술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작가들의 의지는 러시아 예술을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러시아라는 나라의 강렬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듬뿍 담긴 삶의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