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 속에 내재돼있는 그 사물의 본성을 형상(eidos)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속에는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들어있으므로, 조각가는 다만 그 형상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돕는 조력자에 불과하다고 봤다. 이런 말들은 조각가의 과제가 이미 사물이나 재료 속에 들어있는 본성과 형상을 발견해내는 일임을 주지시킨다. 그러니까 진정한 조각은 한갓 개념으로 환원되는 순수한 인식적 행위의 소산도 아니거니와, 인위적인 재주의 결과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조각은 주체가 사물, 세계, 대상의 감각적 질료와 치열하게 교감하는 과정 중에 사물, 세계, 대상이 자기의 본성을 열어 보이는 순간을 캐치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순간이야말로 사물의 본성, 완전한 형상, 생명, 내재적 에너지가 응축돼 있는 정점이다.

조각에 대한 이러한 관념이나 그 본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좋은 사례가 되는 조각가가 정현이다. 그는 흔한 호박돌 속에서 그 돌의 본성을 찾아내고, 채굴된 석탄 덩어리 속에서 그 석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본성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가급적 재료 그대로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가공만을 더한다. 이렇게 제안된 호박돌과 석탄 덩어리는 그 고유의 표정을 갖고 있으며, 묘하게도 사람의 초상을 닮아 있다. 오랜 세월 닳고 닳은 호박돌이나 퇴적층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었을 석탄 덩어리가 그동안 삭여냈을 시간의 흔적이 표정을 띠게 되고, 이는 그대로 사람의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정현 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주요 작가를 선정하고 전시하는 <올해의 작가>전 형식으로 열렸으며, 이 제도가 만들어진 이래 조각가로는 정현이 처음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더 크다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전시에는 작가의 주요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작가의 프랑스 유학 시기를 전후로 제작된 초기(1980년대 후반) 작품들까지 망라한 것이어서 작가의 예술 세계 전반을 한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정현의 조각에 나타난 특징으론 무엇보다도 남다른 재료를 들 수 있다. 석고, 마닐라삼, 콜타르, 나무, 침목, 아스콘, 석탄, 돌 등의 천연 재료와 반(半)자연 재료가 거의 원형 그대로 제안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조각을 모더니즘의 물성 조각에 접맥케 한다. 그러나 작가의 조각은 재료 자체의 물질적인 성질에 천착한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재료가 함축하고 있는 에너지나 힘과 같은 내적 계기를 끄집어냄으로써 단순한 물성 조각과는 구별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재료의 거친 질감으로부터 인간의 보편적인 상처, 표정, 초상을 불러내는 것이다. 마닐라삼으로 대략적인 형태를 만든 다음, 이를 석고로 고착시킨 초상에는 마치 살을 발라낸 듯한 실존적 인간의 자의식이 느껴진다. 석탄이나 돌을 재료로 한 조각은 몇 개의 비정형적이고 우연적인 선만으로도 초상이나 표정을 암시해주고 있으며, 그 표정이 존재의 상처를 떠올려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처럼 작가는 재료로부터 그 속에 내장된 고유의 본성과 에너지를, 초상과의 닮은꼴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의 상처를 끄집어내고 있다.

이와 함께 흥미로운 재료로는 아스콘과 침목을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아스콘이나 침목은 하나같이 길에 깔리는 재료들이다. 사람과 자동차가 밟고 지나다니는 재료가 아스콘이며, 기차의 레일을 지지하는 재료가 침목이다. 아스콘이나 침목은 말하자면 세계를 지지하는 기층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재료들로부터 인간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조건을, 특히 축적된 삶의 시간과 상처를 대리해주는 존재론적 메타포를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