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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적 공간의 이동과 인식지도의 움직임을 체험한다
통권 : 41 / 년월 : 2013년 9,10월 / 조회수 : 1681

이응노미술관과 필자가 공동기획한 《이응노 : 세상을 넘어 시대를 그리다》 전시가 10월 27일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응노가 작업했던 지역인 서울, 도쿄, 파리, 대전에 주목했다. 그는 왜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이동하였을까? 그를 이동시킨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한 화가의 지리적 공간의 이동은, 그의 인식지도의 움직임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이러한 공간의 이동은 화가의 작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한반도를 사랑했던, 한민족을 사랑했던 이응노에게 각 공간의 지역성은 어떠한 자장을 만들어냈을까? 이러한 화두를 전시 공간 안에 펼쳐놓고, 이응노의 사유의 과정을 따라 가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전시 공간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획되었다. ‘서울 : 꿈을 찾아 현실에 서다’, ‘동경 : 타자의 공간에서 현실을 배우다’, ‘파리 :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보다’, ‘대전 : 시대에 서서 세상을 그리다’의 4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응노가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로 향한 것은 19살 때였다. 자신의 눈으로 인생을 설계하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아버님은 상투를 틀고 매일 한문만 읽고 계셨어요”라는 그의 회상 속에서 그가 자라난 유년시절의 환경이 그려진다.
혼돈의 공간이었던 20세기 초반, ‘모던’은 일상의 삶속에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갑자기 상투를 틀지, 머리를 단발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로 다가왔던 것이 아니라 결단의 문제로 서 있었다. 단발을 하는 순간 집에서 쫓겨났던 이응노와 같은 청년이 있었으며, 자유연애에 눈뜬 청춘들은 부둥켜안고 삶과 죽음을 고민하곤 하였다. 갑자기 일상은 24시간에 맞춰졌고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이러한 일상의 변화는 대도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홍천에도 그렇게 모던의 문제가 일상으로 다가왔다. 신식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이응노는, 상투를 틀고 매일 한문을 읽는 자신은 시대에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 청년 이응노의 고민은 청년의 머리를 단발하게 하였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일푼으로 서울로 향하게 하였다. 작고도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전위에 서고자 하였던 예술가에게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명제는 그의 삶을 관통하게 된다.

물론 서울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열다섯 번이나 찾아가고 나서야 자신을 제자로 받아준 김규진. 그의 문하에서 화가로서의 등단은 손쉽게 찾아왔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입상 이후 꽤 오랫동안 수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보다 더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예술이란 전통을 답습하는 것으로 가능할까? 미술 안에도 시대 형식이라는 것이 있을까? 지역성과 시대성은 대립되는 것일까? 그것은 미술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일까? 답이 떠오르지 않자 그는 다시 답을 찾아 떠난다. 그 곳이 일본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았다. 동경이라는 공간은 서구의 흐름이 즉자적으로 전해지는 매력적인 공간이었지만, 다른 한편 이응노에게 동경이라는 공간은,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타자화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특히 동경 시기 이응노의 인식지도 안에서 동경과 한국은 연결된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서울에 있을 때 인식공간의 지도는 서울이 중심이었던 것에 비해, 동경 시대 그의 인식공간은 서울에 동경이 추가되면서 보다 확대된다. 동경에서, 서울에서 열리는 전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제작하여 보내는 등, 서울과 동경을 넘나든다. 갓 쓰고 한복을 입고 동경 시내 다니기를 즐겼던 이응노에게 동경은 타자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읽어내기 위해 배워야 할 공간이었다.
일본에서 이응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태도와 방식을 배운다. 서울로 귀국 후엔 그 방식은 보다 확대한다. 한편으로는 사물에서 더 나아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방식으로 확대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을 응찰함으로써 사물의 외형을 만들어내는 사물의 본질까지 파악하고 이를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단계로 나아간다. 후자의 형식은 서구의 전위미술과 형식적인 면에서 상통하면서 주목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혼돈의 시대는, 화가에게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전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예술은 무엇인가? 실존의 문제에 대해 다시 묻게 하였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응노는 때론 자신에 집중했고 때론 전통에 몰두했으며, 동시에 시대정신을 꿰뚫어보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는 훌훌 털고 자신의 경계 밖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을 조망해보고자 하였다. 56세.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낯선 나이에 그는 파리로 주저 없이 떠났다.  

조선시대 화가들의 인식지도 안에 서양은 없었다. 일본도 ‘왜’라고 부르면서 폄하하였지만, 문화적 범주 안에서 서구는 더 더욱이 배울 필요가 없는 지역이었다. 지금도 우리 안에는 제3세계의 문화를 보면서 “특이하고 신기하네” 할지언정, 굳이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선입관과 문화적 우월성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듯이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그 목록에 서구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시기 우리의 인식지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20세기 초반 서양이, 총칼을 들고 거부할 수 없는 물리적 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때 대한제국이 선택한 해결책은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 서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항에서도 여전히 정신과 문화는 우리가 앞선다는 이 인식은 서구의 그릇, 즉 형식만 차용하겠다는 동도서기의 정신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응노의 스승들의 세대. 즉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세대들의 인식지도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제자, 이응노를 비롯한 김은호, 변관식, 이상범은 이미 일본을 인식지도의 중심에 올려놓았으며, 그 다음세대들은 서양을 문화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 중심의 중심이 파리였다.

 한 사람의 인식지도는 자신의 삶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지만 자신의 세계관과 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자신의 인식지도가 한반도로 규정되어 있는 친구들과 자신의 인식지도에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는 친구들이, 자신의 지역성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할 때, 삶의 방향이 혼란스러울 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두 발 딛고 서 있는 땅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뿌리를  재검검하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넒은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존재했던 좌표를 재점검하고 길을 묻는다. 이응노는 후자다. 56세. 흔히 곧 60이라며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할 것 같은 나이에 그는 더 넒은 세상에서 자신을 다시 재점검하기 위해 안정된 삶을 정리하고 말도 안 통하는 세상 속으로 훌훌 떠났다.

안정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 쯤 끊임없이 훌훌 털고 떠나는 이응노의 삶은 정주민의 삶과 대치된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미래인류를 ‘유목민nomad’이라 지칭했다. 이응노는 유목민이였을까?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주목했던 ‘유목민적 사유’에 익숙했던 예술가였던 것일까?
유목민처럼 떠돌지 않고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정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주를 가능케 하는 경계를 지키며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 경계 안에서 공동체의 끈끈함이 만들어지고 학습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한 바와 같이 그러한 정체성의 응집은, 흔히 배타적 정체성으로 작동되곤 한다. 이응노의 대전 시대를 상징하는 투옥이라는 사건은, 이러한 위계적 배타적 정체성이 얼마나 강력하게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북에 있는 아들을 그리는 아비의 마음은 이데올로기 앞에서 단죄된다.
경계와 위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규정하고,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만들어내는 정주자들은, 흔히 유목민들을 정주민들이 만든 조직과 위계를 흐트러트릴 위험한 존재들로 규정하곤 한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토박이로 살아가면서 배타성을 뿜어내는 민족을 숭상하기보다는, 이동하며 살면서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유목민적 사유는, 이응노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친다.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이응노는 노마드임에 틀림없다. 유목민들은 정주민들의 전통과 역사에 동화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는 뿌리내림의 바깥에 있으려고 했고, 거주지 없이 체류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자신의 고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나누는 배타적 경계를 경계 바깥에서 지켜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이응노는,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질 들뢰즈의 사유와는 간극이 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다시 이응노의 삶을 들어다보아야 하는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위계적 배타적 정체성의 해체와 지역적 정체성의 강화가 대립되지 않는다는 화두. 다가오는 유목민의 시대에 이응노는 여전히 선구자였을까? 이응노미술관에서 함께 사유해볼 것을 권한다.




#저자 약력
朴桂利
1968년 서울 생, 미술사학, 미술비평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전통이 어떻게 탄생해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대인의 삶 속에서 와 있는가에 대한 문제, 장인과 예술가에 대한 고민, 삶 속에서 생명을 갖고 꿈틀거리는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carey@naver.com
글쓴이 : 박계리
작성일 :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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