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작고 불투명한 원형의 펜던트가 있다. 유리라고 하기엔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색도 탁한 것이 마치 돌 조각처럼 보인다. 게다가 상당히 풍화되어 본래 색인 청색마저 하얀 막에 가려져 있다. 이 작은 유물이 앞으로 펼쳐질 유구한 유리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리, 삼천 년의 이야기> 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유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경 전 서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초기 유리는 값비싼 터키석과 라피스라줄리처럼 푸른색을 낼 수 있는 원료로 주목받았다. 따라서 석제 구슬이나 도기의 유약으로 사용되거나, 청색의 유리구슬을 엮어 목걸이로 만들어졌다. 용기의 형태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0년 이후의 일. 이후 다양한 제작 기법의 발달과 이슬람의 융성, 실크로드를 비롯한 교역로의 발달 등으로 인해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깊고 넓은 유리의 역사를, 이 전시에서는 지중해 및 서아시아에서 출토된 유리를 중심으로 제작 기법에 초점을 맞춰 구성하였다. 이 전시에 따르면 유리 제작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기원전 1세기경 대롱불기 기법이 개발된 것인데, 이 기법으로 인해 대량 생산 및 다양한 기형 제작이 가능해지면서 유리가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전시는 1부에서 대롱불기 기법 이전의 유리를, 2부에서 대롱불기 기법으로 만들어진 유리를, 3부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및 이슬람 문화권에서 발달한 다양한 유리 제품을 보여준다.

화려한 유리의 여정
전시에서 선보이는 400여 점의 유물들은 기원전 1,500년 전부터 기원후 1,500년까지 3,000년을 아우르고 있으며, 대부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지중해 및 서아시아 등지에서 제작되었다. 이 모든 유물은 일본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실크로드 미술관 소장품으로, 화백 히라야마 이쿠오가 50여 년에 걸쳐 수집하고 있는 실크로드 컬렉션의 일부분이다.
전시는 앞에서 언급한 작은 펜던트를 시작으로 화려한 유리의 여정을 펼쳐 보이고 있다. 기원전 14세기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에서 발견된 청색의 유리 목걸이, 기원전 5~4세기경 동쪽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 꽃잎 무늬의 투명한 유리 대접, 기원 전후 모자이크 기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유리구슬 및 그릇들, 기원후 제작된 다양한 기형의 그릇들, 이슬람 문화권에서 만개한 아름다운 장식 유리들. 특히 기원전 1세기에 개발된 대롱불기 기법으로 인해 얼마나 다양한 기형의 제작이 가능해졌는지, 유리 제작 기법이 최고조로 발달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장식 유리들은 또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전시는 14세기경 시리아에서 제작된 에나멜 장식 유리 조각들로 끝이 난다. 유리 표면에 에나멜 안료를 사용하여 화려한 문양을 그려 넣은 것으로 유럽이나 중국에서도 크게 유행하였으며, 베네치아 유리 공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유리병의 희소성
그러나 지중해 및 서아시아에서 제작, 출토된 유리 제품만으로는 유리의 삼천 년 이야기를 완성할 수 없다.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유리의 여정은 세계 각지에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어져 갔다. 전시에서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 몇 가지를 여기에 풀어보고자 한다.
7세기 이후 이슬람 문화가 확대되면서 유리는 이슬람 전역뿐만 아니라 유럽,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통되었다. 이러한 유리의 여정에 한반도의 신라도 빠지지 않는다. 경주에서는 실로 다양한 유리제품이 출토되었다.
그 중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유리병은 참으로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연녹색을 띠고 있는 이 유리병은 둥그런 몸에 긴 목이 이어져 있으며 남색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러한 기형의 유리병은 서아시아 등지에서 선호했던 오이노코에(Oinochoe, 봉수병)로, 본 전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남색의 손잡이에는 금줄이 감겨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손잡이가 부러져 금줄로 수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유리병이 얼마나 귀한 물건이기에 금줄로 수리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 병은 수리된 채로 왕실의 무덤에 부장되었다. 송림사 전탑에서 출토된 사리용기 역시 서아시아로부터 유입된 유리그릇이다. 이 용기는 원래 이슬람 세계에서 화장품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신라에서는 부처의 사리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그 희귀성으로 인해 현지에서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는 신라 사회에서 유리그릇이 얼마나 소중히 여겨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출생지 서아시아를 떠난 유리가 극동에 닿으면서, 그 가치가 말할 수 없이 높아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유리의 여정
그렇다면 서아시아의 유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 신라에까지 왔던 것일까?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은 이에 대한 일말의 단서를 제공한다. 미추왕릉의 피장자가 걸고 있던 목걸이에는 파란색의 작은 구슬이 있다. 지름이 고작 1.6cm에 불과한 이 구슬 안에는 다섯 명의 사람, 여섯 마리의 새, 나무와 꽃 등이 묘사되어 있다. 가히 신의 경지에 오른 기술이라 하겠다. 사람의 얼굴이 묘사된 유리구슬은 기원전•후 동지중해 연안 및 이집트 등지에서 많이 제작되었으며, 이 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상당히 유사한 양식의 구슬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해상 루트를 통해 유입되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베트남 북부지역, 한반도, 일본 등지에 출토된 것으로 보아, 육로와 해로를 포함한 다양한 실크로드가 복합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역시 출생지 서아시아를 떠난 유리는 초원, 사막, 바다를 가리지 않고 나아갔으며, 그 생명력에 더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고 갈구했으리라.
이처럼 유리의 이야기는 한정된 시공간 안에 담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롱불기 기법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이슬람 유리의 화려함은 아직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가 유리잔에 담긴 차를 마시며 창문 너머 거리 풍경을 바라보고 성능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한, 유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