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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간의 기억과 '개인'의 깊이
통권 : 38 / 년월 : 2013년 1,2월 / 조회수 : 2004
<응답하라 90's 홍대앞>展 (서교예술실험센터, 2013.1.4~13)

 

"우리는 망각의 위험에 처해 있다. 어차피 상실될 수밖에 없는 내용들과는 별개로 그런 망각은 인간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한 가지 차원을 박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깊이라는 차원이다. 왜냐하면 기억과 깊이는 동일한 것이며, 그 깊이란 기억하는 일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l) 1)

 

'응답하라'는 부름이나 물음에 응하여 대답하라는 요청의 명령문이다. 너도 나도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액정에 눈을 맞추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카톡을 주고받으며 SNS에 접속한 상태로 살아가는 요즘 어쩌면 ‘응답하라’는 썩 잘 어울리는 말이자 항상(恒常)적인 우리들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또한 2012년 ‘괴물처럼’ 등장하여 숱하게 회자된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처럼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이야기’2)가 가득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구에게, 무엇을 응답하라는 것일까? 그저 ‘내게 말을 해봐’도 아니고, ‘내 질문에 답을 해줘’도 아닌 ‘응답하라’는 어딘가 발화자와 그의 대상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느껴진다. 마치 대상을 확인할 수 없는 광활한 외계를 향해 교신을 보내듯. 타임머신이라도 등장해야 어울릴 만한 시대 간격을 전제로 어떤 현존의 부재와 상실에 반하여 소환을 촉구하는 희미한 깜빡임의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2013년 벽두에 ‘1990년대 홍대앞’을 소환하며, 응답하길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시를 통해 ‘추억’을 발견하든, ‘역사’를 느끼든 각자의 차이겠지만 바라건대, 이로부터 현재까지 하나로 이어진 ‘시간’을 감지하면 좋겠다. 이 자리는 바로 그걸 위해,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어떤 시간을 거치고 어떤 사람들을 통해 구성되었는지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90년대 홍대앞을 호출하는 까닭은 단지 ‘그때가 좋았다’는 향수이거나 한낱 추억을 공유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의 홍대 문화의 전형을 만들어냈던 그 시기를 호출하고, 당시 문화 공간들, 지금은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해 버린 그 장소들을 환기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온 긴 ‘시간’을 감지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 홍대앞이 처한 좌표를 짚어 보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시 기획의도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억과 기록, 나아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대안의 모색, 전열의 재정비 차원에서 90년대 홍대앞을 불러낸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나 ‘자고 일어나면 새 건물이 치솟’고, 잠시 떼고 있던 시선을 돌리면 어느새 내가 가고자 하는 장소는 바뀌고 없는 곳이 요즘의 홍대앞이다. 이런 현상이 어디 홍대앞만인가. 예전 신촌이 그랬고, 최근 가로수길이 그렇다. 1980년대까지 미술대학으로 이름난 홍익대가 있던 ‘홍대앞’은 중상층의 조용하고 깨끗한 주택가였고, 큰길가를 중심으로 미술학원과 미대 학생들의 작업실, 화방, 외국잡지 서점 등이 있던 곳이다. 이런 장소적 특성에 따라 우리 사회가 급격히 재편되었던 1990년대 들어서면서 홍대앞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공간적 내용과 형식이 갖춰지게 되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이 주류였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개인‘이 등장하고 개인의 욕망을 긍정한 시대”라고 정의한다. 특히 90년대에 홍대앞을 근거지로 삼아 대거 등장한 문화공간들과 문화잡지들은 물론, 실제 홍대앞의 지배적 분위기는 이처럼 ‘나’를 내세우고 거리낌 없이 취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보편적 역사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존재와 그 형상이 조각되어 두드러지게 되었던 시기이자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홍대앞이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스마트 시대라는 요즘 ‘개인’의 존재가 스마트(smart)한 문화 패턴의 한 조각처럼 극단적으로 파편화되어 취급되는 상황에서 되돌아보면 확연하게 느껴지는 차이이며 새삼 90년대 홍대앞을 소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저항적인 리얼리즘으로 현실 정치에 대항했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 홍대앞은 이후 문화 예술의 지배적 경향이 된 ‘크로스오버’와 혼성, 잡종의 싹이 움트는 풍부한 토양이 되어 주었다. 즉 ‘생생한 문화적 활력’을 바탕으로 기존 주류 질서에 대항하는 ‘대안적 성격’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문화예술 담론에 새로운 갈래를 더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홍대앞 문화의 원형은 모든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위성을 즉각 시스템 내부로 흡수해 버렸던 폭력적인 거대 자본의 논리 앞에서 변질되거나 흩어지고 사라지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모든 부문이 그렇듯 우리 문화의 고질적 한계인 아카이브(archive)의 취약함이다. 우리는 지속적 시간의 맥락이라는 역사에 발을 딛지 않고서는 존재의 의미를 설명할 수도 없고 자존을 담보할 수도 없다. 따라서 기억과 기록은 인간의 존재가치는 물론 개인의 역사에 결(layer)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 부족하나마 아카이브를 공개하고, 맵핑(mapping)을 시도한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응답할 주체는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라고 할 때, 90년대 대표적 문화잡지였던 『REVIEW』 창간호에 실린 서영채의 글로 이 짧고 허술한 리뷰의 결론을 대신하고 싶다. 다음 인용에서 ‘매니아’의 자리에 지켜내고 살려내야 할 고유한 ‘홍대앞’을 대입해도 좋겠고,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나’를 대입해서 이해해도 좋겠다.
진정한 매니아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바깥이 아니라 안이며, 그 내면의 진정성이자 깊이였다.
매니아를 향한 동경과 열망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 일반의 추동력과 상반된다. 매니아를 향한 열망이 깊이와 관련되는 것인 데 반해 그 바깥 세계의 동력은 높이를 향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 시대 대중문화가 소유하고 있는 저 엄청난 위력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바벨탑의 정상에 서고자 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매니아는 그 높이의 신화에 맞서는 깊이의 상징이라고,
(…)
원하는 것은, 꾸미고 장식해야 하는 밖의 유대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서로 만나는 안의 유대이고, 문화적 민주주의의 양적 확산이 아니라 질적 고양이다. 독창성을 향한 열망이다.
우리사회가 바벨탑을 향한 광기 어린 에로스로 미만해 있을 때, 타자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폭력, 정글의 논리라는 홉즈의 진단이 전일적인 것으로 관철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문화의 영역에서조차 생산성과 유용성이라는 탑의 신화가 상업주의와 연합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 매니아는 그로부터 자신을 유리시키고, 그 고립과 격절의 공간에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심연의 질서를 벼리어내는 문화적 항체이다. 거대한 광기에 저항하는 작은 광기이다. 전체로부터 개체를 분리해내는 타나토스(Thanatos)이되 자본제적 힘이라는 무차별적이고 가차 없는 타나토스에 맞서는 작은, 그러나 어김없이 그 거인의 발목을 거는 타나토스이다.3)




#저자 약력
李和英 1962년 서울생. 미술평론가·서대문문화원 사무국장. rothko62@naver.com

#주석
1) 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과거와 미래 사이」(푸른숲, 2005.)
2) 이야기, 즉 history는 이야기와 역사를 함께 의미한다.
3) 서영채,「매니아의 욕망부정의 진정성」, 「REVIEW」겨울, 창간호(문예마당, 1994.)
글쓴이 : 이화영
작성일 : 201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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