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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적 보수주의와 결합의 미학
통권 : 38 / 년월 : 2013년 1,2월 / 조회수 : 7309
<아이다 마코토-천재라서 미안합니다> (일본 모리미술관(森美術館), 2012.11.17~ 2013.3.31)

초기작품이라는 것은 작가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구사하게 될 방법론을 처음으로 펼쳐 보이는 곳이다. 아이다 마코토(?田誠)의 경우 실질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거대후지대원>이 그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아이다 마코토에게 “방법”이란 무엇일까.
1991년에 제작된 <논길>이라는 작품이 있다. 논두렁길과 여고생의 머리 가르마가 하나로 이어져서 화면의 중심부로부터 분열한다. 논두렁길의 모티프가 된 것은 화가 히가시야마의 <길>(1950)이며, 여고생은 아이다가 이후 집요하게 그려 나가게 되는 대상이다. 머리 가르마는 논두렁길이 되어 근대일본미술과 여고생이라는 동떨어진 대상을 ‘결합’한다. 아이다 마코토의 회화에서 일관되어 나타나는 주제는 이처럼, 결코 만날 리 없는 여러 사물들의 형상을 회화적인 공간을 통해 접속시키는 것이다. <거대후지대원 VS 킹 기도라>에서는 풍속화인 춘화와 서브 컬처가 절충적으로 결합된다. 모든 것이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한편, 그 배후에 있는 유형 혹은 기호적인 표상체계(현대일본화, 풍속화, 여고생, 망가(만화), 아니메(일본 애니메이션))를 하나의 표본을 통해 드러낸다. 따라서 아이다 마코토의 회화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이미지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유형•기호화된 표상이다. 혹은 이를 미술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양식화된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것은 특정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귀속하는 하나의 집합적인 구조=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다 마코토가 다루는 것은 미술사적 주제인지 세속적인 주제인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 모두가 하나의 유형으로서 양식화된 것이다. 그의 작품을 떠돌아다니는 온갖 유머러스한 뉘앙스들은 기본적으로 여러 사물의 형상들이 문맥을 결여한 채 난데없이 결합함으로써 기지(위트)가 생성되는 효과에 의한 것이다.

 

 

"양식"의 편집
이러한 아이다의 방법이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마그리트의 회화가 아닐까. 당연한 문맥을 결여한 여러 사물 형상의 만남을 서양회화의 인습적인 공간표현에 의해 실현시키는 것. 혹은 그곳에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포함하는 인식론적인 착오를 발생시키는 것. 알려진 대로 마그리트의 회화는 모더니스트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인습적인 회화적 수정주의를 잔존시키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다 마코토의 회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논길>에서 화면을 수직으로 나누는 하나의 분할선은 가까움과 멀리 있음을 폭력적으로 접속시킨다. 하지만 ‘길’과 여고생 머리의 ‘가르마’ 사이의 간격은 그로 인해 무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돌발적인 결합으로 인해 이번에는 둘의 차이=거리 자체가 눈에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작에 의해 회화의 도면/대지의 구분이 흔들릴 리 없다. 오히려 아이다의 회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도면/대지의 배분으로 형성된 인습적인 회화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 마그리트 또한 동일하게 여겨졌던 것처럼 - 아이다 마코토의 ‘회화적 보수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러 양식과 모티프(미니멀리즘, 전쟁화, 현대 풍속, 신파…)를 병치하여 절충하는 아이다 마코토의 방법은, 작품이 회화가 아닌 경우에도 회화적인 보수성을 유지하는 것에 의해 수행된다. 하지만 본래 여러 양식을 접합시키는, 즉 양식 비판인 아이다 마코토의 회화는 이를 위한 하나의 회화공간=보수적인 구상적 경향을 선택하고 만다. 여기서 아이다의 회화는 역설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물론 의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과 철학 2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2011)이라는 세 개의 영상이 있다. 유형화된 프랑스인 화가로 분장한 아이다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며 카메라를 향해 설치된 유리에 추상회화를 그리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동일한 연출이 독일과 미국의 화가라는 설정으로도 반복된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각각의 추상회화는 하나의 유형 혹은 기호적 표상으로서 타국의 글라스 페인팅=추상회화로 상대화된다. 이들은 서로 병치되는 구상적(피규러티브한) 성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글라스 페인팅은 예를 들어 신문의 연재만화에서 조롱 받는 전위주의적 추상회화처럼, 이미 망가=유형이라 변화한 회화양식의 패러디일 뿐이다. 따라서 아이다의 많은 작품에 만화적인 풍경이 떠다니는 것은 그의 세대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양식비판적인 방법과 무관하지 않다.

 

성교=결합의 신화체계
이미 기술한 것처럼 이러한 양식 비판, 즉 여러 양식의 결합이라는 방법은 <거대후지대원 VS 킹 기도라>라는 데뷔작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다. 아이다의 방법론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적결합=성교의 묘사이다. 아이다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남근적인 조형물(거대한 똥, 나이프, 커다란 도롱뇽, 버섯구름…)은 전부 남근적인 결합의 지표이다. 또한 그의 만화 <뮤턴트 하나코>(1999)는 태평양전쟁을 문자 그대로 ‘하나코’의 성교의 역사로 재 기술한다. <뮤턴트 하나코>는 일본 『고사기(古事記)』(오래된 일본 역사서) 등에서도 보이는 성교 묘사의 반복을 통해 근대일본사를 신화 공간으로 그려내려는 의도를 가진다. 이는 반대로 태평양전쟁, 천황제, 전쟁화 문제 등을 전통적인 회화양식과 교착시켜 그리는 아이다의 작품들이 그러한 성적 충동=결합에의 욕망을  회화사와 근대사와의 ‘충돌’이라는 주제로 발견해내었음을 의미한다.


본래 <뮤턴트 하나코>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대학의 학생이었던 작가 자신의 출발점인 회화의 전통형식과 매우 사적인 에로틱한 망상이 결합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태도를 본다면, 아이다 마코토의 작품들이 겹겹으로 굴절된 자기인식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어떠한 양식의 패러디에 대해서도 쿨한 시뮬레이셔니즘(simulationism)에 관계없이 잔인한 자의식을 드러낼 것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캔버스 위에 드러나는 것은 여러 입장을 상징적으로 유형화하면서도 그 전부를 묶어내는, 후기-역사적인(post-historical) 편집작업에 종사하는 메타 프레임으로서의 ‘나’이다. 아마 작가 자신이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입장의 복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아이다 마코토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양식의 복수성이 하나의 강력한 자아의 의해 묶이어 회수되어 버리는 것. 키시다 류우세이(岸田劉生)로 대표되는 다이쇼 시대의 근대적 천재에 대한 환상이 이러한 자의식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한다면, ‘천재라서 미안합니다’라는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이러한 천재 개념에 대한 사과=자기비판을 성립시킨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종래의 아이다 마코토의 방법론에 대해 스스로 회의를 촉구하며 자기비판을 시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과연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메타 프레임으로서의 ‘나’로부터 길드적 생산체제에
3.11 동일본 재해가 일어난 다음 해의 현대 미술전이기도 하기에, 본 전시에서도 재해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작품이 출품되었다. 예를 들어 거대한 벽의 한 면을 수많은 트위터의 아이콘과 트윗이 가득 채우고 있는 <모뉴먼트 포 낫싱 5(monument for nothing 5)>(2012)가 그 중 하나이다. 이를 하나하나 읽어보면 각각의 트윗이 탈 원자력발전/원자력발전 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에 국한되지 않은 채, 재해로 인해 드러나게 된 무수한 입장과 관점들을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트윗이 반영하는 것처럼 재해는 우리를 안이하게 공존을 이야기할 수 없는 수많은 입장들로 분열시켰다. 우리는 재해를 겪음으로써 ‘제각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상징하는 너덜너덜한 형상이 트위터의 트윗에 겹쳐지는 이 작품에서, 넝마가 된 발전소는 이미 산산조각으로 해체되어 버린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이 공간에서는 어떠한 아이콘도 다른 상대에 대해 초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이 작품의 작가인 아이다 마코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서 여러 입장을 중재하는 하나의 주체는 결코 출현할 수 없다. 즉 재해 이후의 표상공간에서는, 여러 입장으로 나누어져 이를 중재하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중간관리적인 자기인식으로 번민에 빠진 아이다 마코토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널빤지 상자의 오브제를 집단 제작하는 <모뉴먼트 포 낫싱 2(monument for nothing 2)>(2008)는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아이다는 고딕미술, 즉 중세의 길드적인 생산체제를 모방했다고 말한다. 이는 거대해진 자의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군상으로 이루어진 집단성의 한 끝에서 스스로 자신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아이다가 가진 현재의 윤리관을 뒷받침한다(아이다는 “기분은 고딕”이라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집단 제작이야말로 ‘중우정치시대’의 레퀴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라는 뜻일까.

 

 


아이다 마코토의 현재는 예고된 시대의 어두운 정경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시대가 어둠으로 이동하는 이때, 주체의 존재론적인 위상은 더욱 해체되어 비극적인 색을 더해갈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미수 기계>(2001~2002) 시리즈나 <주먹밥 가면의 너무 작은 여로>(2005~)의 작품공간을 가득 채웠던 슬픔으로 넘쳐나는 주체의 얼굴은, 이를 선점 혹은 상징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약력
1982년 일본 오카야마현생. 미술평론가. ryosawayama@gmail.com
글쓴이 : 사와야마 료
작성일 : 201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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