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에서 책 읽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읽는 책과 신문은 세상을 배우고 문화를 습득하는 작은 창구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매체들이 증가하고, 최근 2~3년 사이 스마트폰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 읽는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화려한 영상미로 눈을 자극하는 것들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아진 시대에 빠르게 스크롤 되는 화면의 텍스트를 듬성듬성 읽는 것이 익숙해 진 세대에게 흰 종이에 빼곡하게 메워진 텍스트를 읽는 것은 너무 어렵고 귀찮은 일이다. 이에 책도 오프라인 인쇄 매체라는 인식을 엎고, 태블릿 PC나 전자책의 대중화에 발 맞춰 플랫폼을 바꿔가는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가정 지출에서 ‘책 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빵 값’만도 못하다는 조사 결과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보고로 불렸던 영광을 뒤로 하고 출판 시장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그나마 생존해 있는 출판 시장 역시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 다른 영상 매체의 영향력에 요동친다. 원작 도서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를 얻을 경우, 베스트셀러 순위는 단 하루 만에 뒤바뀐다. 결국 출판계 스스로 경향을 만들어 내거나 주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잔혹하지만, 그것이 현재 출판 시장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벼랑 끝에 서는가 싶었던 출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책 읽는 라디오’의 등장이다.
 2012년 초, EBS는 라디오 개편을 앞두고 ‘책 읽어주는 라디오’라는 개편 방향을 발표했다. 라디오 방송 한 주파수를 통째로 책에 대한 정보만을 전달하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것이 주 요지였다. 104.5(수도권 기준) 주파수는 하루 종일 베스트셀러에 대한 정보 전달, 연재소설 낭독으로 채워진다. 책을 ‘보는’ 것이 힘들다면 ‘듣게’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 책과 타 매체 간의 결합 작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TV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 등 책과 타 매체의 결합 작업은 적지 않게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이처럼 한 채널 자체를 책에 대한 테마로 채우는 것은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
 EBS의 이러한 시도가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2010년 초부터 소설가 김영하는 팟캐스트를 통해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낭독 프로그램을 운영해 오고 있다. 이 팟캐스트는 다른 라디오 방송과 달리 개인적인 멘트가 거의 없고 낭독으로만 진행되는데, 국내에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소설가인 만큼 일반적인 낭독 프로그램에 비해 인기도 많은 편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 흡사한 팟캐스트로 <책 읽는 라디오>도 있다. 책에 대한 이야기와 소소한 팁들을 전해주는 이 방송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를 기반으로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청취자들을 모으고 있다. 팟캐스트에서 ‘듣는 라디오’가 어느새 사람들에게 익숙한 존재로 내려앉은 것이다. 1~2년 전부터 이렇게 시작된 시도와 독자들의 호응은 EBS가 라디오 채널 하나를 열어 책에 대한 이야기로 채우는 데 큰 기반이 되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낭독이라는 콘셉트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시작된 오디오북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비스되고 있었고, TV나 라디오에서 심야에 ‘책을 읽어주는’ 콘셉트의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현재도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건재하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이 프로그램들은 일정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2012년에 특별히 이 ‘듣는 라디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책이 라디오를 택한 이유, 그리고 라디오가 전면으로 책 낭독이라는 콘셉트를 차용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두 매체가 서로 경쟁 관계가 아닌 협력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와 라디오 방송은 사람들의 감각 영역에서 각기 차지하는 바가 다른 매체다. 책은 시각적인 매체고, 라디오는 청각적인 매체다.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이는 중요한 요소다. 청각 자체가 우리의 일상을 영위하는 데 절대적인 위치가 아니고, 오히려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지켜주는 기능을 대체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라디오는 책에, 그리고 책은 라디오에 서로 스스럼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둘 사이에는 ‘아날로그’라는 공통된 정서가 있다. 영상 매체가 발달하면서 그 인기가 한풀 꺾인 라디오는 아날로그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책 역시 아날로그 정서의 대표 주자이긴 마찬가지다. 간편한 전자책이 등장해도 직접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인쇄 도서에 대한 독자들의 높은 지지도는 책이 그만큼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대표하는 아이템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처럼 라디오와 책이 가진 공통적인 아날로그 정서와 각자의 특성에 대한 보완 능력은 책을 읽어주는 라디오가 탄생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 책과 라디오가 함께하기에 충분했던 것은 아니다. TV나 공연을 통해서도 이 낭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근본적인 이유 두 가지 만으로 ‘책 읽어주는 라디오’가 탄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책과 라디오가 각각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조건을 서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책은 영상 매체와 인터넷의 대중화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깊이 있는 읽기보다는, 빠르고 생동감 있는 정보를 스캔하는 데 익숙한 현 세대들은 더 이상 애써 깊이 있는 독서를 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 인쇄 매체로서의 위치에서 변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을 ‘빼앗아야만’ 하는 책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연스럽게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었고, 이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라디오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낭독 문화 자체가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기에 책은 ‘들려주는’ 매체인 라디오에 가장 쉽게 융화될 수 있었고, 동시에 청각 매체이기 때문에 청취자들이 굳이 별도의 시간을 들여 독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 접근성 또한 높다.

 
 반면, 라디오의 경우는 음악을 제외한 콘텐츠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새로운 음악을 접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던 라디오는 이제 그 역할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더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라디오를 틀어 놓고 공테이프를 카세트에 넣어둔 채 조마조마하게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음악이 있으면 스마트폰으로 온라인 뮤직 스토어에 접속해 쉽게 mp3파일을 다운로드한다. 전 세계로 연결된 온라인 음반 시장 덕에 굳이 라디오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접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라디오의 가장 큰 콘텐츠이자 무기였던 음악은 더는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라디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때 보인 것이 위기에 빠진 콘텐츠 책이었다.
 이처럼 음악 말고 새로운 콘텐츠가 필요했던 라디오와 멀어져 가는 독자들과의 접점을 높이고 호기심을 갖게 할 계기가 필요했던 책은 그렇게 ‘책 읽어주는 라디오’를 탄생시켰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수용자적 입장에서 대중들이 원하던 책과 라디오로 대표되는 아날로그적 정서가 더해졌다.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다. 예전에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정도의 기술 변화가 10~20년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어느덧 세상은 한 분기마다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내놓는다. 사람들은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다 줄 생활의 편리함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새로이 익혀야 하는 것들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거나 적응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바로 지난 것들에 그리움을 느낀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반가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그 틈새를 파고들게 된 것이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다. 팟캐스트로 연결되는 기기는 최첨단의 것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아날로그의 세계로 독자들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기기와 콘텐츠의 기묘한 동거를 통해 대중들은 ‘좋은 접근성’과 그 속에 담긴 ‘아날로그 콘텐츠’를 접하며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팟캐스트는 ‘책 읽어주는 라디오’가 만들어 지는 계기가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2012년은 나라에서 지정한 ‘국민 독서의 해’다. 매해 낮아지고 있는 독서 인구수에 대한 위기감을 나라 또한 느낀 것으로 해석된다. 수많은 정보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범람하고 있음에도 책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책은 쉽사리 대체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극적인 시각 정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시각적 풍성함을 통해 감각의 만족감을 주지만, 활자를 통한 독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능력과 상상력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제 그 과정을 라디오가 돕고 있다. 그 변화와 흐름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라디오와 책이 이 과정을 통해 시너지를 내고, 또 청취자가 독자가 되는 과정을 만들어 낸다면 이는 유효한 시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대중과 개인이 좋아하든 아니든, 결국 변화해 갈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서 원형의 보존만을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유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책과 라디오의 흥미로운 변화는 서로 각자가 가진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