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동아연구소 인문한국(HK)학술총서의 첫 권으로 동남아시아의 박물관에 관한 연구를 엮은 이 책은 그동안 동남아시아 지역연구 분야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국립박물관과 상징물을 연구함으로써 현지의 사회, 문화와 역사를 내부의 역동성과 다양성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검토하고, 식민 시대 이후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박물관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함의에 관련된 주요 쟁점들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필자가 아는 바에 의하면, 1914년부터 1917년에 걸쳐 동남아에 체류하였던 독립운동가 정원택(鄭元澤, 1890~1971)이나 김진용(金鎭龍, 1879~1918)과 같은 이들이 이미 1915년 6월경 쿠알라룸푸르의 박물원(博物園)에 가서 ‘남양(南洋) 토인(土人)’의 희귀한 골동품들을 마냥 신기하게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 박물관, 특히 국립박물관의 정체성이나 국가 상징물을 국가나 민족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공표되는 문화 기관이나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 책에서, 2명의 역사학자와 3명의 인류학자는 동남아시아의 박물관을 어떠한 측면에서 받아들이고 있을까?
 

인도네시아 역사학 전공자 송승원은 「박물관의 정치학」(1장)을 통해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 투영되어 있는 식민 내러티브의 양상이 실제의 역사, 문화 및 독립 후의 국가적 내러티브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고찰하고 있다. 또한, 미술사 전공자 강희정의 「머라이언 박물관」(2장)은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국가정체성이 아닌 ‘관제(官製) 국가 만들기’의 전형적 사례를 싱가포르에서 찾아, 정부의 역할과 정책 방향에 초점을 두고 국가 상징물과 박물관이 새로운 국가정체성 형성과 국민 통합을 위해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하는지 분석하고 있다.
 

베트남 인류학 전공자 최호림의 「종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 사이」(3장)는 베트남 국립박물관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박물관의 활동과 관련된 국가의 역할과 민족학 분야의 주요 논쟁을 고찰하고, 캄보디아 지역 인류학 전공자 부경환은 「뚜얼슬렝 학살박물관」(4장)을 통해 1970년대 캄보디아에서 자행되었던 대량 학살과 국가 폭력이 어떠한 식으로 기억되고 재현되는지 탐색한다. 그리고 보다 통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인류학자 에릭 톰슨(Eric C. Thomposn)의 「동남아시아 박물관에 표상된 국가 너머의 세계」(5장)는 국립박물관이 내러티브적, 시각적, 상징적으로 국가라는 관념을 구축하는 기능 외에 지역과 지역 너머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창출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 다섯 편의 글들은 모두 동남아시아 박물관의 역사와 정치에 관하여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국가정체성과 종족정체성, 지배적 집단 기억과 개인적, 주변적 기억, 일국 중심의 영토 인식과 탈국가적 영토 인식 사이의 일정한 긴장과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독립국가의 새로운 국가정체성의 형성 과정, 국가나 지배 집단의 목적과 의도, 민족의식 함양이나 민족주의적 상상의 틀, 국가 너머의 세계와 연결 관계에 대한 부재 등과 같은 잣대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다소 서구적인 시각에 기반을 둔 이 잣대가 현재 발전 중인 동남아시아 각국 박물관의 ‘자생적인’ 존재 노력을 지나치게 평가 절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캄보디아 뚜얼슬렝 학살박물관의 킬링필드 기억과 공간적 배치를 박물관 내부의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분석한 부경환의 글을 제외하면, 기타 4편의 글들은 박물관의 ‘피조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검토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일상에서 동남아시아 박물관 자체에 대한 ‘선험적(先驗的)’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필자가 동남아시아 지역 연구자들과 함께 현지를 여행하다 보면, 이들 중에는 박물관 방문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 표상과 기억의 문화정치”로 건설된 현지 박물관의 현실과 이에 대한 가치 판단 혹은 유물 자체에 대한 무지는 연구자 개인의 적극적인 탐방 의욕도 봉쇄시켜 버린 듯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동남아시아 박물관을 통해 아직도 너무나 보고 배울 것이 많은 필자의 마음도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 박물관에 대한 외부 시선자의 눈길이 과연 내부 피조물 자체의 실존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만 ‘문화정치’의 실상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