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현대의 신화Mythologies』 중에서
중학교에 다닐 무렵, 친구들은 프로레슬링에 푹 빠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프로레슬링 경기가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내가 살던 집으로 왔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고, 집에는 어른이 없었다. 저녁 늦게까지 우리들은 여러 레슬러의 독특한 제스처를 흉내 내거나 어설프게 기술을 따라하며 괴성을 질렀다. 그때의 나에게 레슬링이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보며, 따라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밤중에 잠을 깬 적이 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중 친구들이 빌려놓고 간 비디오테이프가 떠올랐다. 안방으로 가서 테이프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혼자 프로레슬링을 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덩치 큰 남자들이 잔뜩 땀을 흘리며 엉겨 붙어 있었다. 레슬러들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 서로의 몸을 들어 올리거나 손과 발, 그리고 온몸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때로는 높은 곳에서 내던져 지거나 몸을 활짝 펴고 스스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날 내가 혼자 레슬링을 보며 확인한 것은 그러니까,
일종의 순수한 고통이었다.
프로레슬링은 물론 쇼(show)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 엄청난 체구의 남자들이 진심으로 서로의 몸을 부딪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아마 한 주에 서너 명쯤은 죽거나 불구가 될 것이다. 레슬링은 연기의 집합체고, 레슬러란 고도로 훈련된 배우다. 하지만 때때로 연기가 아닌 진짜 고통이 새어나올 때가 있다. 1m가 넘는 로프 위에서 뛰어내릴 때라든가 낙법도 할 수 없는 높이에서 내던져질 때, 훈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통이란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레슬러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상당부분 과장된 것이겠지만 아픔은 분명히 거기 있다.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나는 생각했다. 연기로 꾸며진 프로레슬링조차 저렇게 고통스럽다면 현실은 대체 얼마나 아픈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질려 버렸다. 『더블』을 구성하는 소설들은 상당량의 환상이 뒤섞인 허구로 읽힌다. 소설은 물론 허구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현실이라면 아마 한 편에 서너 명쯤은 미치거나 재기불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더블』의 소설들은 지극히 환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은 처절한 현실직시로 이루어져 있다. 『더블』의 소설들은 24세기의 미래를 다루면서도 지금 이 시대와 다를 것 없는 근본적인 상실감을 이야기하고「깊」, BC 17,000년의 과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생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슬」. 암에 걸린 외로운 남자는 잠시의 낭만과 더불어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게 되고「근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조차 배설물이 함께 한다「낮잠」. 현실은 매우 힘이 좋고 끈질기다.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더블』은 숙련된 레슬러의 잘 짜인 프로레슬링과도 같다. 레슬러들이 고통을 과장하고 훈련된 동작을 수행하는 것처럼 『더블』의 소설들은 환상을 통해 독자를 교란하고 그 안에 상징을 채워 넣는다. 화려한 드롭킥과 바디 프레스가 난무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묘사와 서늘한 반전이 작품 곳곳에 자리해 있고, 각각의 단편들은 험상궂은 힐레슬링의 악역이거나 달콤한 베이비 페이스레슬링의 선역다. 우리는 흡사 레슬링의 관객이 된 것처럼 웃음을 짓고 위안을 얻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희망과 절망이 손바닥을 뒤집듯 엇갈리고 기쁨과 슬픔이 로프반동처럼 교차하며, 근본적인 한계와 실낱같은 희망이 육중한 덩어리가 되어 엉킨다. 레슬러들의 연기가 언제나 필사적이듯이 『더블』의 소설들도 필사적으로 이 세계를 연기한다. 필사적인 것은 언제나 위험하고, 위험한 것은 늘 아름답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이 허구이므로 나는 안심하고, 또한 허구이므로 지극히 불안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냥 프로레슬링을 떠올리면 된다.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고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과장된 고통일지라도 현실의 그것과 결코 다를 것이 없다. 환상이 끼어들고 농담이 개입해도 그 근원에는 한 줌의 인간이 결코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저기 누군가 신음을 흘린다. 그것은 아프다. 그런데 아프지 않다. 누군가 탄성을 터뜨린다. 그런데 죽을 만큼 괴롭다. 바로, 이것이, 세계다.
창비ㅣ2010
李暎勳 1978년 경기 평택생. 소설가. 2008년 문학동네신인상 소설부문 당선. 최근 글로 「어떻게 그런 시간을 지나왔을까」 등. woodla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