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靑島)를 향하는 비행기에서 이 책을 열었다. 절반쯤 읽는데 어느새 도착이다. 인천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 남해 건너 제주도보다 가까울지도 모른다. 단순히 거리감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일에도 황해를 넘나드는 사람들로 비행기는 만석이었던 것이다. ‘국경 넘기’는 이렇게 일상이 되었다. 그 분주한 발걸음의 누적으로 동아시아의 지반은 한층 두터워지고 있다. 더 이상 선언이나 이념형이 아닌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의 그 활발한 신진대사를 촉발시킨 것은 자본의 왕성한 운동이었다. 1990년대 이래 영토의 주박에서 벗어난 자본은 동아시아라는 생활터전을 우리 앞에 마련해주었다. 지구화는 그렇게 지역화와 병진(竝進)한다. 관건은 그 변화의 현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감지해 내는 예민한 촉수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3부 ‘생활하는 동아시아’였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국제결혼과 은퇴이민 그리고 유학생 이동은 생활세계 속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 교류망의 최전선이다. 엮은이들은 이 생생한 현장을 ‘교차하는 텍스트’로 포착한다. 이념에서 일상으로, 동아시아론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더없이 낭만적인 말이다. 헌데 그 낭만을 사고파는 장터가 북적거린다.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국제결혼 중매업이 목하 성황인 것이다. 그리하여 ‘인륜지대사’를 치르기 위해 종종 인륜을 거스르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동하는 시장은 낭만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시선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여성은 페미니즘이 한층 확산된 ‘남녀평등’의 사회를 찾아 북진(北進)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성은 한류 드라마 속의 자상하고 다감한 주인공들이 아니다. 본국의 결혼시장에서 탈락한 남성은 가부장제의 잔해가 남아있는 사회의 여성을 찾아 남진(南進) 중이었기 때문이다. 양자의 행로의 교차 속에서 낭만은 부서지고 삶은 교착한다.
남진하는 일군 가운데 또 다른 무리도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층이 그들이다. 굼뜬 몸을 이끌고 기어이 공간이동을 감행 중이다.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로 동남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만만치 않은 한국에서의 여생이 있다. 조기은퇴와 평균수명의 증가 그리고 노인복지의 미비라는 불협화음이 독특한 인구이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경제의 도약에 기여했던 참전세대였음도 눈길을 끈다. 동남아와 재차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전장을 대신한 오늘의 시장은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일찍이 가사도우미를 송출했던 필리핀은 국책산업의 일환으로 노인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한다. 동남아과 동북아의 재회 속에 동아시아의 산업 또한 재편 중인 것이다. 머지않은 초고령화 사회를 감안하면 은퇴이주가 동아시아 인구이동의 주요 지류가 될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북진과 남진의 교차로에는 ‘남녀문제’와 ‘남북문제’가 난마처럼 얽혀있다. 세계체제의 중심-주변관계가 이 지역 안에서도 뚜렷하게 복제되고 있는 탓이다. 동아시아의 발견이 이곳을 짓눌렀던 서구주의와 민족주의로부터의 출로모색이었다면 이제는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에 주목하여 남녀와 남북의 지혜를 결집해야 하는 단계다. 여기서 지난날의 ‘제3세계론’을 다시금 살펴보는 것도 유력한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하나의 세계’를 ‘민중의 시각’으로 보자는 득의의 발상 말이다. 물론 더 이상 관념적 지향성에 머물 여유와 여력은 없다. 오늘날 동아시아가 노정하는 남과 북의 전방위적 대면은 당장 우리의 몸과 감수성부터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청각을 때리고 낯선 음식과 향신료가 미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생활공간에서 상이한 문화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이들과의 전면적 접촉은 일국적 환경에 길들여진 우리의 감성과 규범을 심문하며, 그 토대를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감수성의 혁신을 도모하는 일상적 훈련이 긴요하다.  

은퇴이민 설명회 모습

물론 감각의 물갈이가 녹록치는 않다. 그 부작용이 외국인 혐오증과 같은 협애한 민족주의로 표출되기도 한다. 허나 그 경직성의 발로는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부동력이 소진되어 활력이 떨어진 사회의 히스테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낯선 타자의 도래를 내부개혁과 사회적 활력의 방편으로 삼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청나라 시대 사회전반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 절실하다. 도시는 물론 농촌과 공장에도 이미 ‘(동)아시아의 풍경’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이는 구체적 장소에 입각해서 ‘국제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훈련장이 도처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각국의 안과 밖에서 생성되고 있는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생활현장이야말로 지방-국가-지역을 하나로 꿰는 창발(創發)적 민주주의의 요람인 것이다. 그 일상적 단련이 만개하는 동아시아 시대의 근력을 다지는 튼튼한 기초작업이 되어줄 터다.

ⓒ창비ㅣ2010

근력과 함께 지력(知力)을 키우는 일 또한 소중하다. 유학생의 방향선회가 남다른 까닭이다. 그들의 시선이 더 이상 서구나 미국으로만 향하지 않고 있음은 각별한 징후다. 보통의 (동)아시아 젊은이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매력을 느껴 그곳에서 성장기 일부를 보내는 경험이 가져다줄 장기적 효과는 헤아릴 수 없다. 서구에 의한 분리지배 속에서 상호무지와 무관심에 갇혀 있던 동아시아가 그 무지를 자각함으로써 학지(學知)를 풍요롭게 하는 공동작업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두뇌 유출’을 대신하는 이처럼 ‘두뇌 순환’을 지혜롭게 활용할 방도가 긴급하다. 특히 동아시아 고등교육의 제휴프로그램이 새로운 학습과정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주목을 요한다. 구미의 유니버시티(University)를 추종하다 망실되었던 대학(大學)의 참뜻을 되살리는 작업과 연동되길 희망한다.

 
               연평도 포격당시 모습                                        사카모토 요시카즈

이렇게 정녕 동아시아로 가는 길은 복수다.* 하지만 결코 에둘러 갈 수 없는 엄중한 길 또한 분명 존재한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하늘 아래 바다는 더없이 삼엄했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긴장이 고조된 황해에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호라는 불청객이 출몰한 것이다. 연평도의 포탄은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누비는 동아시아 연결망 속의 블랙홀로 우리를 이끌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북한의 문제를 새삼 환기시켜 준 것이다. 순식간에 신냉전 구도로 재정렬 되는 동아시아의 냉엄한 실재계로 초대한 것이다. 이 응어리진 한반도의 동맥경화를 푸는 것이야말로 동아시아가 그 또렷한 육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어 요체(要諦)가 아닐 수 없다. 북한 문제를 중심에 두고 부전(不戰) 공동체와 비핵 공동체를 다짐하는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의 구상이 한층 절실하게 들려오는 까닭이다.
이는 21세기 동아시아의 골격을 다시 세우는 대장정이 될 것이다. 그간 유럽에서 빌려 온,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의 외투를 고쳐 입는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패러다임 전환의 중핵으로 남북한의 국가연합(confederation)이 부상하고 있다. 중국도 적합한 형태의 독자적인 연합 혹은 연방(federation)으로 전환하고 나아가 동(북)아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국가연합(union)의 비전으로 확대되기를 사카모토는 희망한다. 그 과정에서 티벳이나 신장(新疆) 또는 타이완과 오키나와(沖繩)가 훨씬 충실한 자치권을 갖는 지역으로 진화하는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쓰시마 해안을 청소하는 부산외대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

보탤 것은 동아시아 국가 간의 현저한 비대칭성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다. 국가를 기본단위로 삼는 공동체가 여의치 않다는 엄연한 사실이야말로 지역주민을 위주로 접근하는 발상의 전환을 선사한다. 분야마다 지역의 현실에?가장 부합하고 주민들의 생활상 이익에 충실한 형태와 수준의 협력 관계를 구현해가는 민제(民際)적 협동이 관건이다. 그래서 바다 쓰레기를 함께 치우는 쓰시마(對馬島)와 부산 간 이웃애(neighborhood)의 발현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국가주의를 해독하고 산업문명의 허욕을 정화하는, 겸허한 수련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침 칭다오에서는 동아시아 11개 도시의 연합모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대국 간의 치열한 힘겨루기 중에서도 저류(低流)에서 맥맥한 지방도시들의 협력이 더없이 소중하다. 생활세계에 뿌리내린 이웃애의 지구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동아시아를 낙관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 최원식,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