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사 │2009

2005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파격적인 시집으로 2000년대 시단을 뜨겁게 달군 김민정의 두 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2009년 12월에 출간되었다. 이른바 ‘미래파(未來派)’로 분류되고 지칭된 시인들의 두 번째 시집이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 대체로 출간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좀 늦은 출간이었다. 그래서 김민정의 두 번째 시집이 더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민정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는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후일담 내지는 번외편에 가깝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적 화자의 어조다. 그녀의 첫 시집도 노골적이긴 했지만 대중문화적 상상력과 하위문화의 외피를 입고 그로테스크(grotesque)미학1의 정수를 보여준 데 비해, 이번 시집의 화자는 한층 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로 말한다. ‘설마 저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예측은 적중할 것이다. 김민정 이전에도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노골적으로 까발려진 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의 여성 시인들은 있었다. 최영미가 그랬고, (지금 와 읽어 보면 그녀 시의 수위는 그야말로 점잖은 수준이었지만) 김언희가 그랬고, 성미정이 그랬으며, 김민정의 첫 시집도 그랬다. 그런데도 우리는 김민정의 두 번째 시집을 읽으며 또 다른 불편함을 경험하게 된다. 왜 그럴까?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을 읽다 보면 눈을 빤히 맞춘 채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띤 입이 건 젊은 여성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여러분은 그녀의 세계를 몰래 훔쳐보며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감정과 분위기를 김민정의 시를 통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다 까발려 보여주는 그녀의 당당함 앞에서 어느새 눈을 피하려고 들거나 불편해하거나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민정의 두 번째 시집이 시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고 형편없기까지 한 모습이다. 혼자 있으면서도 우리를 감시하는 다른 시선을 늘 의식하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까발려지고 감출 것 없이 다 드러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그녀의 시는 요구한다. 겉옷으로 가려진 튀어나온 뱃살이며 여기저기 숨겨진 군살, 나만의 은밀한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나의 치부, 먹고 싸고 하는 일차적 욕구에 굶주려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 여자 또는 남자로 살게 하는 각종 금기들…….

김민정의 전략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김민정의 시는 김행숙, 신해욱, 하재연, 이근화 등 최근 젊은 여성 시인들의 행보가 예민한 여성의 감각으로 포착 가능한 세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과는 극단적인 방향에 가 있기도 하다. 그녀의 노골적인 까발림은 때론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웃음을 가지고 놀 줄 아는 것은 김민정의 타고난 재주다. 첫 시집에서도 종종 활용되던 펀(pun)언어유희은 이번 시집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녀의 시에서 여성은 남성 중심의 성적 억압 구조의 피해자로 그려지지만, 피해자의 수동적인 시선을 넘어서서 그녀 시의 화자는 그런 상황을 조롱하고 비웃음으로써 오히려 가해자보다 우위에 선다. 가족과 학교 같은 가장 친밀한 집단에서 자행되는 성적 억압과 폭력에 대해 그녀가 취하는 태도의 독창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골적으로 까발려진 성적 금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무너진 금기는 초라할 뿐 침묵을 강요하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그저 빤하고 시시하고 그러면서도 안 질리는 이야기(「페니스라는 이름의 페이스」)에 불과해진다.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그녀의 전략은 막무가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주치기 불편해하는 진실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는 점에서는 영리해 보인다. 시답지 않은 시대에 시답지 않은 시를 쓰는(쓸 수밖에 없는) 시인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다.
사실 이토록 막무가내가 된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기보다는 숱하게 폭력적인 상황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이 세대의 성장 환경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남근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억압은 여전히 뿌리 깊다. 우리 사회 곳곳에 그 흔적이 내면화 되어 남아 있는 한, 아마도 김민정의 수다는 계속될 것이다. 빤하고 시시한 이야기에 누가 먼저 질리나 두고 보자고 차가운 웃음을 입에 문 채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내 이야기 한 번 들어 볼래요? 죽은 사람 목숨도 살린다는 그런 이야기 말고 빤하고 시시하고 질리지 않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 한번 들어 볼래요? ‘콜!’(「콜!」) 하고 외치고 싶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질기다(「그녀의 동물은 질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