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송림동 산 8번지. 당진 방앗간, 영미 이발관, 거북오락실이 보인다. 송림식당, 송림슈퍼, 송림복덕방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동네. 골목 사이로 미장이 양씨가, 오뎅 파는 총각이 아저씨가, 아직 어린 갑수와 일남이가 지나가고, 저 멀리서 “똥 퍼! 퍼어”하는 한동팔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다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낯익은 듯 낯선 이 풍경은, 그러나 작가 조혁신에게는 그저 풍경이 아니다. 그는 이 동네를 우리가 스쳐 지나온, 그리고 우리 뒤에 남겨진 풍경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에게 이곳은 삶의 온갖 악다구니가 펼쳐지는 생존의 현장이자 끝내 지켜가야 할 삶터다. 작가는 좬뒤집기 한판』을 통해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담담히 감싸안으며,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진정한 삶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지막하게 전한다. “조악하지만 투박하게 내가 오감으로 느낀 변두리 서민들의 삶을 욕심부리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써갔다”는 「작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소설들이다.

좬뒤집기 한판』은 송림동 산 8번지를 무대로 펼쳐지는 ‘똥8번지 연작’이라 할 만하다. 『뒤집기 한판』에 묶인 소설들은 송림동 8번지라는 배경과 그곳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공유하고 있으며,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상황과 사건을 다양하게 변주해 나간다. 우리는 이미 뛰어난 연작소설들을 여럿 읽어왔다.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무너져내린 삶들을 곡진하게 담아낸 좬관촌수필』과 좬우리동네』(이문구)를, 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과 좬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윤흥길)를 우리는 기억한다. 좬뒤집기 한판』에서 조혁신은 바로 그 길을 가려고 한다. 알다시피 저 소설들이 발표되었던 1970년대는 급격한 사회적 변동의 시기인 동시에 소설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기대가 전례없이 확대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불균형 경제발전에 의해 왜곡된 사회구조를 파헤치고 대안적 전망을 다각도로 확보하고자 했던 작가들은 단편과 장편이 아닌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놓은 연작소설들은 독자와 시대의 요구에 성공적으로 부응할 수 있었다. 요컨대, 현실에 응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0년, 꼬박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이 같은 상황은 다시 반복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뒤집기 한판』의 소설들이 전체적으로 ‘올드’하고 더러 힘없이 읽히는 것은, 작가의 작법상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작가가 무대로 삼은 송림동 산 8번지가 전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포착하고 대변해내기 힘든 주변부 중의 주변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제목이 징후적이다. ‘뒤집기 한판’이라는 말의 앞면에는 ‘전복’의 욕구가 용솟음치지만, 그 뒷면에는 더 이상 세계를 읽어낼 수조차 없다는 인식론적 무력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뒤집어 생각하면 오히려 『뒤집기 한판』의 미덕이기도 하다. 시대의 대변자라는 꼬리표가 떨어져나간 후 아무도 찾아보지 않고 구태여 쓰려고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소외된 주변부를 향한 작가의 애정은 인상적이다. 송림동 8번지의 별칭 ‘똥8번지’가 그런 것처럼 이 소설집의 인간학과 사회학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매개는 바로 ‘똥’이다. ‘먹고 싸지’ 않는 인간이 없듯, 배설하지 않는 사회란 없다. 그러나 똥을 삶을 영속하게 하는 근원으로 돌아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듯 사회가 발전의 뒤편으로 쏟아낸 것 역시 쉽게 외면당하며 급기야 폐기된다. 그 속에 삶이 숨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조혁신은 이를 공들여 보여준다. 송림동 8번지 사람들에게 고용의 불안과 생활의 곤란은 삶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는 사람들의 심성마저 황폐하게 만든다. “매해 겨울마다 겪는 가난과 실직의 그림자가 올 겨울에는 더욱 모질고 야박스러워졌다는 소리가 골목마다 떠도”(「구만길씨의 하루」)는 이 동네에서, 청춘남녀들의 로맨스는 “영화에서나 가능하지 결코 이런 분위기 잡치는 산동네 뒷골목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부처산 똥8번지」)이고, 험난한 세상살이에 상한 아저씨들은 “화풀이할 데가 없어 애꿎은 연탄재라도 걷어차듯 괜스레 서로를 미워하고 주먹다짐을 한”다(「사노라면」).

생동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뒤집기 한판』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입구다. 『뒤집기 한판』은 인물형 연작이다. 장편소설에서라면 부수적으로 다루어졌을 인물들까지 하나하나 서사의 중심으로 호명된다. 헤어박 마샬미용실에 단골들을 죄다 뺏기고 전전긍긍하는 영미이발관 구만길씨의 착잡한 심사(「구만길 씨의 하루」)를 보라. 고리대금과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리고 구의원까지 진출한 속물 유지 고광해(「호황기」)와 수배와 감옥생활 끝에 간암으로 명을 달리한 옛 씨름부 코치 남구(「뒤집기 한판」)는 『뒤집기 한판』의 인물 스펙트럼의 양 끝에 자리한다. 표제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물 남구의 입을 빌어 다시 한번 되풀이된다. “뒤집기 한판이란 것이 있잖냐. 아무리 덩치 큰 놈이 짓눌러도 단숨에 뒤집어 내다꽂는. 언젠가 한 번은 무겁게 짓누르는 이 세상을 반드시 한판거리로 뒤집을 날이 있을 것이다.”(「뒤집기 한판」) 그러나 뒤집기를 “정말 예술”로 했던 남구는 이제 영정 속에서 웃고 있다. 덩치 큰 세상을 시원하게 뒤집는 그 한판에 대한 꿈을 잊지 않고 새기려는 표제작이 작품집의 말미에 배치된 것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뒤집기 한판』에서 ‘뒤집기 한판’에 대한 기대는 그러나, 죽은 남구라는 존재가 그러하듯 차라리 애도의 대상에 가깝다. 동네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갑수에게 아버지의 전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꿈과도 같은 것처럼(「부처산 똥8번지」). 이 점을 무엇보다 여실히 드러내는 인물은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한기준이다. 계몽적 정열도 낭만적 이상도 없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식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 말하길 “여느 386처럼 낭만파, 양심세력, 순정파”일 뿐인 그에게, 구청직원부터 복덕방영감, 옆집 슈퍼 아줌마부터 옆방 순희 엄마에 이르기까지 똥8번지 토박이들은 텃세만 부리는 이기주의자들일 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넉넉한 품은 그들의 팍팍한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한기준은 그들의 텃세를 견디고 때로는 아웅다웅 싸우며 차츰 이 산동네의 삶에 적응해 간다.

섣부른 전망과 거짓 위안 대신, 혹은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꿈에 크게 절망하는 대신, 작가는 이들의 투박한 삶과 그 결에 숨어 있는 상처를 있는 그대로 그리면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전언을 잊지 않는다. 묶여진 소설들의 결말이 두루 그러하다. 소설집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일 「똥 막대기 한 자루」 역시 예외는 아니다. 똥 푸는 직업을 가져 산동네 사람들마저 기피하고 천대하는 대상이었던 한동팔의 지나온 삶은 지독히 아프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하직한 줄로만 알았던 동팔”은 그 험난한 세월을 헤치고 다시 한기준과 조우한다. 똥을 푸다니, 아니 똥을 푸는 일이 2000년대의 소설거리가 되다니. 조혁신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핍진하게 써낸다. 그 진정성이 시대의 변두리에서 한기준과 한동팔이 소주잔을 나누는 쓸쓸한 풍경마저 따뜻하게 덥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