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저널리스트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Bernard- Henri Levy)의 미국 여행기 『아메리칸 버티고』는 170여 년 전에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썼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gueville, 1805~1859)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한 월간지의 제안으로 토크빌의 여정을 따라 미국을 여행하면서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의 예언적인 직관에 감탄하며, 토크빌의 통찰이 오늘날의 미국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토크빌이 프랑스혁명 이후 민주주의 혁명의 순수한 원형을 찾아 뉴잉글랜드(New England)로 갔듯이, 저자가 미국에 간 것은 자신이 직면한 우리 시대의 문제 즉, 유럽의 반미주의적 경향, 유럽과 미국의 관계, 미국의 민주주의와 반테러리즘의 실상이라는 문제와 직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광대한 미 대륙을 누비며 수많은 도시들과 교회, 감옥, 쇼핑몰을 둘러보았다. 또 조지 부시(George Bush)의 강연회에서 라스베가스의 쇼걸 클럽에 이르는 다양한 행사장을 방문하고, 광활한 사막과 산, 평야와 국립공원들을 지나갔으며, 샤론 스톤(Sharon Stone)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를 거쳐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만났다. 그리고 저자가 미국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현기증(vertigo). 

저자는 미국을 두고 “이토록 자신의 정체성에 현기증을 느끼는 나라도 없을 것”좬아메리칸 버티고』, 380쪽 이라고 말하면서, 그 현기증의 징후가 기념 메커니즘의 범람, 사회적 비만의 문제, 점증하는 차별화, 빈곤 영역의 팽창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모든 불길한 전조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국가모델이 파탄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개입, 우파의 정교한 이념조작, 민주당의 방향상실, ‘히틀러 키치(Hitler Kitsch)’의 증세를 보여주는 무기 소지 찬성자들, 사적인 공격과 추적을 일삼는 언론, 정치를 압도하는 신비주의와 도덕주의, ‘스마트한 국경’여행객들의 국경통과 절차를 간소화하는 제도- 편주 과는 거리가 먼 국토안보부 등을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늘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자신의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하며, 제국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반응의 중추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미국의 모델에 이렇게 애정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토크빌의 후예이자, 미국을 자신의 “캐리커처, 혹은 거울 같은 묘한 혈족 관계”라고 느끼는 유럽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인인 저자는 미국이 유럽의 과거 이미지가 아니라 유럽이 상상하는 미래상임을, 또한 미국이 초현대적인 문명의 취향과 이 세상의 여명을 보여주는 풍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임을 느낀다. 말하자면 유럽에게 미국은 타자이되 동양이나 아프리카 같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만나고 알게 해주는 ‘가까운’ 타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미국 여행기에는 유럽과 미국만 있다. 그는 관타나모(Guant'anamo) 수용소의 풍경을 통해서 미국의 그늘을 드러내고, 9·11 이후의 과도한 보안조치가 야기하는 불안과, 카트리나(Katrina) 같은 자연재해에서 불거진 빈곤과 인종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그 거대한 현기증의 덩어리인 미국이 자국의 경계 바깥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저자는 감옥에 수용된 사람들과 이라크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면서도, 미국이 최근 몇 년간 벌인 전쟁에서 죽은 제3세계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심하다. 오히려 그는 최근의 전쟁들(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이 공교롭게도 모두 독재권력의 몰락으로 끝났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미덕을 전 세계와 공유하는 것이 미국의 도덕적 책무라 생각하는 신보수주의들을 두고 과연 그들이 정말 비인간적이고 어리석은 집단이냐고 반문한다.

저자가 토크빌의 명저와 살아 숨쉬는 미대륙을 번갈아 읽어나가며 자신만의 여행기를 썼듯이, 저자의 『아메리칸 버티고』와 현실 속의 미국을 번갈아 읽으며 우리 나름의 미국 여행기를 써보아야 할 필요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면 저자가 미국 감옥에 대한 토크빌의 지나친 관대함을 비판했듯이, 어쩌면 우리도 미국의 신보수주의보다 유럽 반미주의의 ‘무지’를 더 비판하는 저자의 지나친 관대함을 다시 비판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