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덕(咸世德, 1915~1950)은 그 짧은 생애에도 적지 않은 성과작을 남긴 극작가이다. 희곡집 『동승』(1947)에 실린 단막극들은 함세덕 희곡의 빼어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 중 두 번씩이나 영화화되어 널리 알려진 「동승」은 근대 단편소설의 빛나는 성취 그 이상의 평가를 얻고 있다.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의 질곡에 갇혀 있었던 함세덕은 사후 4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20세기 한국 극작가 중 가장 빼어난 언어 구사력과 서정적 묘사로 주옥같은 희곡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함세덕은 1910년대 중반 목포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에서 극작 활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자신의 이념을 좇아 북한으로 건너갔다. 한국전쟁 중 서울로 돌아오다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데뷔작인 「산허구리」(1936)에서 마지막 작품인 「소위 대통령」(1950)까지의 작품활동 과정에서 그는 진폭이 큰 이데올로기적 방향선회를 보였다. 식민지 어촌의 가난한 현실을 리얼하게 담아내던 초기작에서 일제의 전쟁책동을 선전하는 친일극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는 다시 좌익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조국’ 건설에 앞장서는 작품을 발표하는 등 극에서 극으로 표변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의도 기행」을 「황해」로, 「거리는 쾌청한 가을 날씨」를 「고목」으로 개작한 그의 행보는 우리를 아연케 한다. 광풍같이 몰아치던 엄혹한 시대 환경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러한 표변은 작가적 양심 혹은 작가 본연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의심마저 생기게 한다.

그럼에도 함세덕의 작품세계에서 녹록치 않은 저력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노련한 극적 구성과 화려한 수사학이 던져주는 기교의 잔치에 현혹된 것은 아닐까? 함세덕은 데뷔 시절부터 사망 시까지 오로지 극작에만 전념했던 몇 안 되는 전문극작가이지만, 서양 고전의 다독으로 다져진 현란한 기교의 유희만을 펼쳐 보인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유희의 저변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작가 함세덕의 깊이 있는 세계가 오롯이 가로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고교시절부터 연극에 매료되어 오직 연극에만 몰입하게 된 순수한 청년 연극인 함세덕은 그의 작품 세계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윤진현의 『풍경, 함세덕』은 가능한 한 선입견을 배제한 채 함세덕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원점에서 다시 읽어나가는 시도인 것 같다. 기존의 학문적, 비평적 논의를 일단 옆으로 밀쳐놓고, 일종의 백지 상태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펼쳐 보인다. 근대 희곡 연구자에게 함세덕은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문득 귓전에 울리는 풍경 소리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소 복잡하면서도 진폭이 큰 함세덕의 작품세계는 역설적으로 연구자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대상이 된다.
19편의 함세덕 작품을 하얀 스케치북 위에 한 장 한 장 그려나가는 『풍경, 함세덕』은 가장 가벼운 함세덕 읽기에서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덧 새롭게 함세덕의 삶과 시대를 써 나가는 함세덕 쓰기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희곡에 사용된 용어 해설에서 출발하여 시대 배경, 서해 어촌의 생활, 그리고 인천의 지리에 관련된 백과사전적 지식의 클립과 함께 함세덕을 그려나가는 풍경화첩 속에, 인천의 역사와 저자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교차된다. 운명의 장기판처럼.
이러한 다층위적 글쓰기는 ‘-ㅂ니다’로 종결되는 친절한 말씨와 어우러지며 다양한 독자층을 향한 가장 ‘착한 함세덕 읽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전문성 깊은 학술적 논의를 켜켜이 끼워 놓으면서도 누구나 한달음에 함세덕의 매력적인 세계에 접근하도록 이끌고 있다. 가벼운 해설서의 외양 속에 함세덕과 그의 작품세계의 전모를 단번에 보여주는 바로 그것에 이 책만의 울림이 있는 것 같다. 끊었다 다시 읽어도 좋고, 단 번에 내달아 읽어도 좋은, 매우 독특한 형식의 글쓰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평전인 듯, 논문인 듯, 해설서인 듯, 작품집인 듯 그 형식의 다채로움과 자유로움이 이 책에 흘러넘친다.
다만 하나의 약점을 집어내 본다면 작품 개괄이 없고, 인용 부분의 작품 내 위치가 명료하지 않아 제시된 텍스트 읽기가 적이 힘들다는 점이다. 풀 텍스트가 아닌 바에는 왜 그 장면을 선택했는지, 함세덕을 처음 접하는 독자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표현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그것이 독자에게는 함세덕의 작품세계를 열어놓고 접근하게 하고, 또 저자로서는 미완의 과제를 남겨놓아 새로운 탐구를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또한 어느덧 함세덕과 저자를 만나는 새로운 탐구의 교차로에 서 있게 된 것 같다.

朴永楨 1961년 전남 담양생.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예술정책팀장. 최근 글로 『연극영화 통제정책과 국가 이데올로기』, 『한국 근대연극과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등. yjpark@kc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