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선시대 문과백서(朝鮮時代文科白書)』(상)가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이미 공개된 『조선문과방목(朝鮮文科榜目)』 CD-ROM판(동방미디어)의 후속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문과방목』은 1393년부터 1894년에 걸쳐 실시된 과거 문과시험의 합격자에 관한 데이터베이스이다. 문과시험에는 모두 15,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합격했는데, 이 데이터베이스는 합격자의 이름, 합격년도 등 기본 정보뿐 아니라 개인의 여러 인적사항(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와 장인의 이름, 가까운 친척의 문과 합격자, 본관, 거주지 등)을 방대한 자료에 의거해 작성한, 문자 그대로의 노작(勞作)이다. 편자인 송준호(宋俊浩, 1922~2003) 교수와 와그너(Edward W. Wagner, 1924~2001) 교수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깊은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로서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두 석학이 30년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든 작품이다. 그만큼 이 데이터베이스의 가치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500년 이상 과거시험을 실시해온 중국의 경우 문과 합격자의 3분의 1 정도밖에 그 이름을 알 수 없으며 개인정보까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중 일부에 불과한데 비해,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합격자 이름과 자세한 개인정보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아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500년이란 긴 기간 동안 지배계층의 핵심 정보를 이처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닐까.
이번에 출판된 『문과백서』는 조선시대의 모든 문과시험748회 실시됨에 대해서 “각각의 시험이 언제, 어떠한 이유에서 마련되었으며, 몇 명을 선발하였는지, 또 전시(殿試)3단계로 나누어서 실시된 문과시험의 마지막 시험으로서, 임금이 임석한 가운데 실시됨에서의 시험문제는 무엇이었고, 그리고 각 시험과 관련하여 어떤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등을 설명한”(머리말 참조)책이다. 이 작업 또한 송준호 교수와 와그너 교수가 시작했지만, 도중에 두 교수가 별세했기 때문에 송준호 교수의 아들인 송만오(宋萬午) 교수가 완성했다. 우리는 덕분에 조선시대의 문과시험과 그 합격자에 관해 기본적인 정보를 쉽게 알 수 있게 된 셈으로, 앞으로의 연구에 활발하게 이용되리라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 하권도 하루 빨리 출판되기를 고대한다.

『문과백서』의 간행에 즈음해 와그너 교수의 연구에 관해서 그 의미와 문제점을 지적할까 한다. 와그너 교수의 연구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자주 거론된 바 있으며, 특히 그의 연구를 망라해 번역 간행한 이훈상(李勛相) 교수가 자세하게 검토했기 때문에 옥상가옥(屋上架屋)의 느낌이 없지는 않다. 나름대로 논점을 낼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와그너 교수는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미국에서 한국사 연구의 선구자로, 연구대상도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연구가 중심이며 연구사적인 면에서도 제일 값지다고 생각되기에, 여기서도 조선시대 연구를 주로 검토하기로 한다. 다행스럽게도 와그너 교수의 조선시대 연구는 대부분 이훈상 교수와 손숙경(孫淑景)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으므로,『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 관심 있는 독자는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조선시대에 관한 와그너 교수의 연구 역시 조선 전기 지배계층과 사화에 관한 연구, 이른바 초기 족보에 관한 연구, 중인계층의 존재형태와 근대 이행기의 변화에 관한 연구 등 다양하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해 와그너 교수가 추구하려고 했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성에 관한 관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500년 넘는 오랜 기간 조선왕조가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지배계층의 존재 양태를 과거합격자 명단, 족보 같은 자료를 통해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며, 중인에 관한 연구도 지배계층인 양반의 범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와그너 교수가 도달한 결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문과시험의 합격자가 소수의 씨족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1이 상징하듯이 원래 비(非)귀족제적인 성격을 가진 과거시험에 의해 관료가 선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귀족가문이 상층 관직을 독점하는 한편, 과거를 통해서 계속 새로운 인재가 등용되기도 했다는, 서로 상반된 두 요인이 작용하면서 장기지속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근거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적인 견해들, 즉 ‘15~16세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이나 ‘후기 신분제 해체’를 비판한 것이 와그너 교수의 가장 중요한 문제제기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판단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누구나 인정하는 와그너 교수의 업적은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과 합격자에 관한 방대한 자료 조사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그 조사결과를 다른 연구자도 이용할 수 있도록 가공했다는 점이다.

와그너 교수의 연구를 현시점에서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그 문제제기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한국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조선왕조의 장기지속과 관련해서 지배계층의 폐쇄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연구, 조선시대와 근대 이행기 중인에 관한 연구 등은 와그너 교수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들이다.2 그러나 와그너 교수가 장기지속 문제를 변하지 않는 부분과 변하는 부분의 양면(예를 들어 문과시험의 폐쇄성과 개방성이라는 양면성)에서 보려했던 것에 반해, 최근 미국 학계에서는 변하지 않았던 부분에 관심이 편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와그너 교수의 연구를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와그너 교수의 연구성과 중 한국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부분은 소수 가문의 상층 지배세력 독점 현상을 밝힌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과 합격자 명단과 족보를 분석해 도출한 것으로, 틀림없이 의미있는 지적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 후학에게 과제로 남아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양태를 비교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다. 와그너 교수는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소수 가문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지표를 통해 밝히고 있지만, 그들 지표를 다른 지역과 비교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안동권씨성화보』(1476년)와 『문화유씨가정보』(1565년)에 의거해 두 족보에 문과 합격자의 80% 이상이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지배계층이 좁은 범위에서 배출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배계층이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현상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를 통해서만 조선이 유별하게 독점이 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아직까지도 행한 적이 없다. 문과 합격자를 소수 씨족이 독점했다는 지적도 중국과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라 생각되지만, 중국과 조선의 엄밀한 비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중국, 일본, 유럽 등의 사례와 비교하는 작업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와그너 교수의 연구 중 미흡한 또 하나의 문제는 안동 권씨, 문화 유씨라고 하는 성관(姓貫)집단에 관한 문제이다. 즉 소수 가문의 지배층 독점도 성관집단을 단위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관집단을 하나의 조직적인 집단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엄밀한 검토가 없다.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집단을 ‘클랜(clan)’이라는 영어로 표현했는데, 클랜은 원래 계보관계가 분명치 않은 사람을 시조로 형성되는 집단이다. 한국의 성관집단은 시조와의 관계가 분명한 경우도 있고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는데,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자각하면서도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고 분석의 단위로 삼았던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최근 미국 학계에서는 성관집단을 ‘리니지(lineage)’로 표현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리니지는 계보관계가 분명한 사림의 후손들에 의해 형성되는 집단이다. 따라서 한국의 성관집단을 표현하는 말로는 클랜도, 리니지도 적절하지 않다. 오늘과 같은 성관집단은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걸친 긴 시간을 통해서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봐야 하며, 성관집단이 조선 전기부터 존재한 것처럼 전제하는 연구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주)
1 문과 합격자는 약 750개의 씨족에서 나왔는데 그 중 21개의 유력한 씨족에서 전체 합격자의 40%가 배출되었다.
2 정두희, 『유교·전통·변용: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보는 한국사의 흐름』, 국학자료원, 2005 및 Kyung-Moon Hwang, Beyond Birth: social status in the emergence of moder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n Center, 2004 참조.

宮嶋博史 1948년 일본 오오사카(大阪)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최근 글로 「일본이 기록한 임진왜란」, 『조선과 중국 : 근세 오백년을 가다』 등. miyajima@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