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벌써 반백 년 이상을 끌어온 분단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조심스럽게 디디고 나가야 할 것이다. 누군들 남과 북의 대치상황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였을까.
예컨대 『효풍』(<자유신문>, 1948.1.1∼1948.11.3)을 써내려갔던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가 닿아있다.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된 민족국가 형성이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던 것. 그렇지만 상황은 그리 낙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는 염상섭이 몸으로 직접 체험했던 바다. <신민일보>의 편집국장으로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논조로 입장을 폈다가 1948년 4월 28일 잡혀 들어가 열흘 정도 구류를 살다 나왔기 때문이다. 5월 3일과 5월 10일 사이의 갑작스런 연재 중단은 이로써 말미암았다. <신민일보>는 5월 26일 폐간되었다.

그렇다면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좌와 우를 ‘근대의 양면성’으로 묶고 새로운 르네상스(제3휴머니즘)를 호기롭게 주장하던 그였다. 하지만 현실의 거대한 벽을 거듭 체감하던 그는 1948년에 들어서면서 우익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해방』(<동아일보>, 1949.9.1∼1950.2.16)은 이를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다. 동리의 분신인 주인공 이장우는 “난 자네가 그렇게 극우(極右)될 줄은 몰랐어”라며 “이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지양한 ‘제3세계’의 출현을 상상할 수는 없는가?”라는 하윤철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자네와 같은 이상이나 희망으로는 가능하겠지.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요 구체적인 방법은 그 어느 ‘한 개의 세계’가 다른 ‘한 개의 세계’를 극복하는 길밖에 없어. 이 ‘두 개의 세계’에 가담하여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이 ‘두 개의 세계’에 불만과 불평을 가지고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일세. 그들의 가슴 속이야말로 각각 자네와 같은, 아니 자네 이상의 꿈과 희망과 도의를 가지고 있네. 그들은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우선 가능한 그 어느 ‘한 개의 세계’에 가담하여 싸우고 있는 것일세.

동리가 이후 ‘한 개의 세계’에 매몰되어 버리고 만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주창했던 순수문학이란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관념의 표백에 지나지 않는다. 구류를 살다 나온 이후 횡보의 『효풍』은 밀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며, 1963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의미 있는 작품을 창작하지도 못하였다. 이는 우파의 문학(김동리)과 중간파의 문학(염상섭)이 다다른 한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들의 사상은 현실 가운데에서 그렇게 침몰해 나갔다. 그렇다면 좌파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여기에 대답하는 작품이 바로 김남천(金南天, 본명 효식孝植, 1911~1953)의 『1945년 8ㆍ15』(<자유신문>, 1945.10.15∼1946.6.28)다.

갑작스럽게 연재가 중단된 까닭에 『1945년 8ㆍ15』가 역사의 하중을 견디어 냈다고 보기는 어려울 성 싶다. 생생하게 제기된 중요한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갈등의 해결 과정이 이어지지 못하였으니 아쉬운 바가 많다는 것이다. 가령 우익의 편에 선 무경은 누이 문경이 레닌의 『민족문제』를 읽고 있자 다음과 같이 빈정댄다. “민족문제, 공산당이 무슨 민족문젠가?”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했던 당대 좌파의 견해가 뚜렷한 질감으로 다가오려면 인물의 형상화와 사건의 전개를 통해 부각되어야 할 터인데, 『1945년 8ㆍ15』는 그만 바로 그 앞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물론 의식의 자각을 통한 인물의 변모과정, 급박했던 당대 현실의 묘사, 비판의식 등은 최상급 리얼리스트의 자격에 값하는 바 있다. 논쟁과정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새삼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기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민주주의 정당인 이상 정책을 명시하고 그 정책의 정당성에 의하여 대중의 지지를 요망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요, 만약 정강 정책보다 대의명분이나 임시정부 지지만을 걸고 나간다면 그것은 결국 정권욕의 표현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정당의 자멸의 길이요, 비민주주의적 생장의 길이다.” 껍데기뿐인 ‘민주’를 내걸고 능변을 일삼는 정치꾼들이 득세하는 현재의 시국에 견주어 보더라도 기억해 둘 만한 내용이다.

“아, 어떻게 이 어려운 난관을 돌파할 것인가.” 『1945년 8ㆍ15』의 마지막 문장이다. 문경의 이러한 독백 위에 작가 김남천은 고민은 그대로 겹쳐진다. 그리고 그러한 자문에 응당 잇따라야 할 자답의 내용은 미완인 채 남겨져 있다. 민중적 입장(좌파)과 민족을 동시에 끌어안았던 이들이 미처 가지 못했던 길,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길인 셈이다. 그 길은 2007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오늘날까지 새롭게 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묻게 된다. 좌파도, 우파도, 중간파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막강한 역사의 장벽 앞에서 어떤 선택이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길을 나선 자만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가 어려우리라. 자, 어느 방향으로 길을 나설 것인가. 리얼리즘은 여기서부터 요청된다. 김남천은, 『1945년 8ㆍ15』는 그 시작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