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사람들에게 동남아시아는 가장 많이 찾는 해외 여행지 중의 하나거나 일 하러 건너온 노동자와 베트남, 필리핀에서 시집온 아주머니들의 고향이며,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들로 이뤄진 지역이다. 여행 중에 앙코르와트(캄보디아), 보로부두르(인도네시아),에메랄드(태국) 사원의 섬세함과 웅장함을 보고 동남아시아의 과거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 단편적인 지식들, 예를 들어 태국은 전세계의 제국주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거나, 태국 왕은 현존하는 어떤 왕보다도 많은 존경을 받는 높은 권위의 소유자라거나, 전통시대의 베트남은 우리와 함께 유교문화권에 속했다거나, 마찬가지로 중국의 진ㆍ한ㆍ몽고의 침입을 당했다거나, 하는 정보들 또한 동남아시아의 과거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러한 관심에 부응할만한 책은 동남아시아 여행 관련 도서와 두세 권의 번역판 개설서 정도였다. 책상에 앉아 동남아시아 전통 시대의 역사를 개괄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싶었던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책 또한 그 이상을 뛰어넘지 못했다. 영어를 읽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읽을거리는 조금 더 많아진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홀(D. G. E. Hall)의 저서 같이 두껍고 어려운 책과 씨름해야 하거나 오스본(Milton Osborne), 사르데사이(D. R. SarDesai)의 책처럼 짧고 이해하기 쉽지만 조금쯤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최병욱이 쓴 『동남아시아사 전통시대』(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6)는 바로 이러한 다양한 관심과 아쉬움에 답하고 있다는 면에서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학계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점할 만하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동남아시아사를 한 저자의 시선으로 일관성 있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사에 관해 읽을 만한 책은 구미와 동남아시아를 모두 포괄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최병욱의 이 책도 그 대열에 든다. 둘째, 동남아시아의 전통시대를 알맞은 무게와 분량을 갖춰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전통시대는 그야말로 ‘다른 세계’다. 이는 각 지역, 시대, 주제별 연구 성과들이 양적으로 적은데다 질적으로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현존하는 자료의 척박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전통시대사 자체의 복잡성과 특수성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전통시대사는 많은 책 속에서 미로 혹은 공백이었다. 이 미로에 지도를 제시하고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이 책, 『동남아시아사 전통시대』다. 셋째, 이 책은 우리말로 쓴 최초의 동남아시아 통사다. 필자는 동남아시아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우리말로 된 개설서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처음 나온 우리말 동남아시아사가 수준 있고 깔끔한 것이어서 앞으로 나올 책들에 좋은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구미 자료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베트남인이 남긴 한문 사료까지 참고하여 동남아시아사 전통시대의 구성을 보완했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동남아시아 전통시대를 4부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이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과 개성, 그리고 푸난ㆍ참파ㆍ스리비자야ㆍ사일랜드라 등 초기 국가들이 활약한 제1시기가 제1부, 전통시대를 제2시기와 제3시기로 가르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자 몽고가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친 13세기까지의 동남아시아사 여정이 제2부의 내용이다. 저자의 시대 구분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어떻게 장기 왕조로 발전했는지, 앙코르 제국의 존재는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그리고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의 기원이 된 수코타이 왕국, 파간 왕국, 마타람 왕국의 진짜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접할 수 있다. 제3부와 제4부에서는 14세기부터 19세기 내지 20세기 초까지의 동남아시아사를 각국별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저항과 남진, 태국 개방의 전통과 ‘자유’, 미얀마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 이 시기 대륙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말레이시아의 타협과 공존의 역사 그리고 싱가폴의 건설뿐만 아니라 브루네이 역사 형성, 그리고 네덜란드, 스페인을 각각 만나면서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국가 단위 서술을 기본으로 하는 까닭에, 하나의 역사권(歷史圈)으로서의 동남아시아사가 갖는 의미를 간추려 내려면 독자들이 많은 수고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사를 구성하는 개별 단위로서 국가별 역사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는지, 그 방식은 어땠는지 대해 독자들이 좀 더 주목할 수 있도록 보완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