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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투명한 영혼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통권 : 50 / 년월 : 2015년 3,4월 / 조회수 : 2160
성석제, 『투명인간』, 창비, 2014.

자살자 OECD 1위인 나라 한국. 한국의 현실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파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빚에 몰려 이자를 갚기에도 허덕이는 사람들, 온 시간을 노동에 바쳐도 삶이 더 나아질 수 없는 사람들, 나아가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 미래의 삶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로 인해 분노와 실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소설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투명인간작가의 말에서, 성석제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실 저들은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처럼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할 것이어서, 문학 작품을 읽을 시간도 갖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은 저들의 삶을 외면해버려야 하는가? 그러나 저들을 소설이 외면하면서 존속하고자 한다면, 소설은 한갓 정신적인 피난처나 현실에서 유리된 고고한 장소에 거주하는 오만함을 보여줄 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라는 현실의 쓰나미에 의해 사람들이 망망대해로 쓸려나가고 있는 판에, 소설은 그러한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성석제는 함께 존재하며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을 글로써 보여줄 수는 있다고, 그래서 아직 소설이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에 따라 생각해보면, 투명인간은 이 사회에서 자살에까지 몰리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군가 당신과 같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써진 소설이다.

 

투명인간은 만수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더불어서 작가는 만수라는 개인의 삶을 통해 한국 역사와 사회의 전형적인 축도를 그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된 일대기다. 이 소설에는 수많은 화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에서 만나게 된 만수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한 바를 덧붙여 이야기한다. 이들의 말을 통해 만수의 삶이 조금씩 드러나고, 독자는 이 말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만수의 삶을 이해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만수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여러 사람의 삶 역시 조명되면서 이 삶들을 통해 전반적인 시대상이 그려진다. 그런데 화자가 만수가 되는 부분은 없다. 작가는 왜 이런 구성법을 시도한 것일까? 이는 만수의 바깥쪽에서 그의 삶이 다채롭게 조명됨으로써, 만수의 여러 면이 부각될 수 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어떤 한 사람의 존재는 타인에게 흔적을 남김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구성법일 수도 있다. 한강에 투신함으로써 투명인간이 된 만수는 곧 있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흔적들을 재생함으로써, 그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들과 같이 살기 위해 노력했으며 같이 살아나갔다는 것을 작가는 기록하고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지 모른다.

 

만수의 탄생부터 투명인간이 되기까지 만수의 일대기를 그린 이 소설은 만수의 몰락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에서 만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몰락하게 되는 만수의 형제자매들-형 백수, 큰 누나 금희, 작은 누나 명희, 동생 석수, 막내 옥희-의 삶도 주요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만수의 가족이며, 이 소설은 한 가족의 몰락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몰락 뒤에는 일제 지배체제와 독립운동, 노동자의 희생을 딛고 가동된 산업화, 박정희 군사정권, 고문을 일삼은 신군부 독재체제와 이에 저항하는 학생 노동자들, IMF 이후 현재까지 이르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체제 등 한국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가히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작동한 한국의 지배체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했던 가난한 가족이 결국 어떻게 파괴되고 몰락하는가를, 작가는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을 구성하여 보여준다. 만수의 가족이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었다는 면에서 그 비극성은 더 깊다.

 

만수의 할아버지부터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만석꾼 집안의 아들인 그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높은 뜻을 품어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그 후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평생 없어지지 않을 지병을 얻는다. 또한 집안 역시 풍비박산되어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하여 개운리에서 살게 된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가담이 없었다면 만석꾼 집안의 4대독자로 고생 없이 살았을 만수의 아버지는, 집안의 몰락이 책만 보았던 자신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멀리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육체노동만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안의 첫째 백수의 죽음 역시 시대가 낳은 비극이었다. 백수는 그 마을의 첫째가는 수재로서, 집안의 대들보가 될 청년이었다. 책이라면 진저리치는 아버지도 백수를 아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백수가 국립대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등록금을 마련하느라고 소를 파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한다. 백수의 성품도 훌륭해서 아우들이 믿고 의지하는 맏이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부모로부터 돈을 받지 않고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노동과 피를 팔면서 생활해나간다. 급기야 돈을 마련하고자 월남전 참전에 자원하게 되는데, 그는 그곳에서 전사(戰死)가 아니라 병사(病死)하고 만다. 전장에서의 병사는 치욕스러운 일로, 어떠한 보상금도 나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의 병사는 미군이 뿌린 고엽제에 따른 것이었다.

 

둘째 누나 명희의 운명도 가혹한 것이었다. 만수의 누나들인 금희와 명희는 공부를 잘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노동을 해서 집안을 먹여 살리고 만수와 석수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이 역시 1970년대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의 전형적인 삶이었다). 그런데 명희가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사건-당시 가난한 집에서 많이 벌어졌던 일이었는데-으로 바보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평생을 정신 지체아처럼 살게 될 명희는 훗날 투명인간이 되었다가 말았다가 할 것인데, 그때 그녀는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동생 석수의 삶도 비극적이다. 큰 누나 금희가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버려서 만수네 집안 살림은 극도의 빈궁에 떨어지고 어린 만수가 겨우 꾸려나가게 되는데, 석수와 옥희 역시 매우 공부를 잘 해서 만수는 두 동생의 학업도 책임지게 된다(하지만 석수는 만수를 멍청하다고 업신여기고 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군 입대 대신 경찰을 선택한 만수는 뒷돈을 받으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댈 수 있게 되고, 이 덕분으로 석수와 옥희는 일류대학에 진학한다. 이기적인 성품을 가진 석수는 돈을 벌기 위해 공단에 위장취업 했다가 운동 관계로 위장취업한 오영주와 사귀게 되는데, 그만 오영주에 얽혀 있는 조직 사건에 엮이게 된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고 군대에 입대, 정보원 노릇을 하다가 실종되어버린다. 투명인간이 된 것이다(그는 소설에서 사라졌다가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여, 소설의 서두를 연 화자가 바로 그였음이 드러난다).

 

주인공 만수의 삶은? 머리가 좀 큰 만수는 난산 끝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직후에도 비실댔고 성장이 늦었다. 똘똘한 다른 형제자매와는 달리 어리숙했지만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아이였다. 아버지는 만수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했지만 할아버지는 만수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아꼈다. 정말 만수는 성실하고 선량했으며 자신의 가족을 제 몸보다 더 아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오직 석수와 옥희의 뒷바라지를 위한 노동 속에서 소진되었고 결국에는 빚을 안고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다. 만수는 의무경찰 제대 후 건실한 회사에 관리직으로 취직하고 생산직 노동자로부터도 회사로부터도 높은 신망을 받게 된다. 또한 어느 정도 돈을 모으게 되어 학생시절 노동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가와 결혼한 옥희의 살림살이를 기사식당을 내주어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오영주가 낳은 사라진 석수의 아들 태석이를 거두어 아들처럼 키우고. 회사 동료의 애인이었던 진주와 결혼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불행은 만수를 강타하게 된다. 아마 IMF 때일 것이다.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만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끝까지 공장을 지키다가 결국 수억 원의 배상금을 빚으로 떠안게 된다. 사라진 사장을 믿고 우직하게 공장을 사수하려고 하다가 결국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 짓눌려 신용불량자가 되어 밑바닥 삶으로 전락한 것이다.

 

만수는 식당 명의를 옥희에게 내어주고 진주와 태석, 명희와 함께 산동네로 들어가서 극빈 생활을 하게 되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인내심으로 불평 없이 하루 온종일 노동하면서 겨우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만수의 불행은 그치지 않는다. 머리가 좋지만 자폐증세를 보이는 태석이와 만수의 누이 명희를 어렵게 뒷바라지했던 진주에게 신장병이 있음이 발견되면서, 만수는 막대한 병원비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가족을 돌보느라 노동시간도 줄여야 했다. 다시 빚은 늘어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태석이는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태석이는 만수의 마지막 희망인 혈육이었고, 그가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근거이기도 했다. 아이들과의 갈등이 적혀 있는 태석의 유서를 읽은 사람 좋던 만수는 결국 병원에서 황소처럼 고함을지른다.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이놈의 세상, 이놈의 자식들, 내가 절대로 그냥 안둬! 죽여! 죽여! 죽여!”(350)라고. 태석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신뢰가 무너지고, 만수를 지탱해오던 삶의 윤리도 무너진 것이다. 삶의 전반적인 붕괴를 맞으면서 만수는 결국 투명인간이 되어버리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하지만 작가는 태석이 죽으면서 진주를 엄마라고 처음으로 부르면서 자신의 신장을 진주에게 기증하고는 진주와 화해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소설이 비극의 극단에로까지 진행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투명인간을 다 읽고 나면 아릿한 슬픔과 착잡함에 젖게 된다. 선량함과 성실함, 이타심이 세상에 의해 짓이겨지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짓이겨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와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렇게 짓이겨져서 투명인간이 되어야 겨우 평온하게 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 작가는 그들이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묵직한 마음만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석제 특유의 유머러스한 서술과 묘사들을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성석제는 장면화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 소설에서도, 영화감독 임순례가 표사에서도 말했듯이, “세밀한 기억력을 통해 1960~1990년대의 일상의 전형적인 상황정교하게 복원한 솜씨를 볼 수 있다. 1960년대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만들어서 노는 장면이라든지 순진한 아이들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진행되는 국민학교졸업식 장면, 고목나무를 훼손한 학생을 잡는답시고 교련교사가 학생들을 집에 보내지 않다가 만수를 폭행하는 장면, 연탄가스에 중독된 금희와 명희 누나 중에서 고압산소 치료 탱크에 들어갈 이로 만수가 금희 누나를 선택하는 마음 아픈 장면, 옥희를 찾기 위해 만수가 동료와 함께 서울 시내 데모 현장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유머러스한 장면, 진주가 말 안 듣고 자신을 무시하는 태석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면서 방에 가두는 장면 등에서 독자를 웃기고 울리는 작가의 탁월한 입담을 맛볼 수 있고 정교한 복원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진면목은 한국 근대사의 시대상이 드러나는 저 장면들을 묘사하고 풀어내는 글의 결에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투명인간이 된 만수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명인간이 된 만수가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도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365)라고 말할 때, 그는 죽어서도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족은 태석과 같이 이미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인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오다가 결국 죽어서 투명인간이 된 만수(아이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던 태석이도 마찬가지로 투명인간처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투명인간들이 끼리끼리 한강 다리 아래 고수부지에 소풍을 나와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367) 공동체를 만들어 살 수 있게 된다. 투명인간 만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366)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만수는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만수가 살아오면서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었던 유토피아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깊이 원하고 있었던 저 세계야말로 만수를 만수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벽을 넘는 세계, 존재가 뒤섞이면서 서로의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있는 세계다. 그러나 만수의 그러한 소망은 지나치게 가족주의의 한계에 갇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을 투명인간이 된 석수가 투명인간 만수에게 제기했을 때, 만수는 단지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365)라고 응답한다. 억지로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산 사람들-대부분 가족이다-에 대해 자연스레 존경과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만수다운 대답은, 만수의 소망을 혈통을 중시하는 가족주의라고만 볼 수는 없게 만든다. 나아가 이는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아서 투명인간 같았으면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삶을 다했던 만수와 같은 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영혼, 또 다른 의미에서 투명한 영혼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귀한 영혼은 타인과 존재가 뒤섞이며 서로의 깊은 곳에 다다르는 데에서 진짜 나를 찾는 이가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여, 󰡔투명인간󰡕은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그러한 투명한 영혼을, 어떤 한 인간의 삶을 다수의 입을 통해 복원함으로써 가시화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투명인간은 투명인간에게 당신을 보고 있으며 당신으로부터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소설이다. 그 소설을 투명인간들이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성석제는 누군가가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그에게 전달하고자 계속 노력하는 것, 그리고 지금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면서 웃고 울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실체로서 존재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소설가가 현재 지녀야할 윤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설이 무력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소설이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투명인간이 아무쪼록 이 세상의 투명인간들에게 읽힐 수 있기를, 그래서 위안은 되지 못하더라고 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나마 붙잡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 역시 투명인간일지도 모르기에, 감히 이런 말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저자 약력
李城赫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redland21@hanmail.net
글쓴이 : 이성혁
작성일 : 201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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