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종결되고 2년여의 과도기를 거쳐 1978년 12월 ‘사회주의 현대화’를 구호로 내세운 덩 샤오핑(鄧小平)의 개혁겙낱堧?시작되었다. 이후 30년 전후의 시간을 개괄하는 데 포스트사회주의(postsocialism)는 유용한 개념이다. 마오 저동(毛澤東)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극단인 문혁은 그 극복을 전제한 덩 샤오핑의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시기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베이징대학 중문학부에 재직하면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특히 페미니즘과 영화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다이 진화(戴錦華) 교수가 자주 쓰는 표현 중의 하나는 ‘탈주하다 그물에 걸림(逃脫中的落網)’이다. 시시포스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곤경으로부터 탈출했지만 더 큰 그물에 걸린 격’인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를 비유하고 있다. 1980년대의 ‘큰 그물’인 문혁으로부터 탈출했지만 그 ‘문화심리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권력이라면, 1990년대의 ‘큰 그물’은 전지구적 자본에 포섭된 시장이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은 탈식민문화(postcolonial culture)의 현장이기도 한데, ‘안개 속 풍경(霧中風景)’과 ‘거울의 성’은 그에 대한 상징적 수사이다.

『무중풍경』은 3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독립되면서도 상호 연계되어 있다. 이 책을 읽노라면 줌업(zoom-up)카메라가 연상된다. 1978년 이후 중국의 사회겧???배경이 ‘안개 속 풍경’처럼 그려지다가, 4세대부터 6세대까지의 중국영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가운데 5세대가 부각되며, 다시 장 이머우(張藝謀)와 천 카이거(陳凱歌)에 초점을 맞추다가 마지막에는 화면 가득 장 이머우로 채워진다. 장 이머우는 다이 진화가 감독한 이 책의 주연인 셈이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사회겧???콘텍스트와 중국영화라는 텍스트 사이를 오가는 다이 진화의 분석대상은 4세대부터 6세대까지다. 그 중심에 놓인 5세대는 “1982년 중국영화사에 나타난 최초의 청년촬영제작팀과 1983년 말과 1984년에 조용히 작품을 발표하여 흥미와 경이를 불러일으킨 청년창작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의 의미는 영화사적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문혁이라는 ‘문화적 재앙의 유복자’로서, 그들은 1980년대의 역사겧???‘반성[反思]’ 운동에 참여했고 영화를 통해 당대 중국문화에 전면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중국 역사와 담론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장 이머우와 천 카이거가 있다.

저자 표현대로 장 이머우는 중국영화계의 ‘복장(福將)’임에 틀림없다. 이는 수많은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핵심은 그가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영화계와 문화계의 흐름을 잘 타 왔다는 데 있다. 초기의 자유로운 실험, 적절한 시점에서의 국제영화제 수상, 국가권력과 시장화의 이중압박 하의 해외자본투자 그리고 최근의 중국식블록버스터 제작, 2008년 베이징올림픽개막식 총감독 등. 이런 도정은 그를 단순한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하기 어렵게 만든다. 저자의 장 이머우론의 핵심은 이렇다. 즉, 장 이머우는 ‘탈식민 문화의 잔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했고 세계무대로 나가기 위해 ‘동방적 경관(oriental spectacle)’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이중적 정체성(dual identity)’ 전략을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묘하게 동방과 서방, 중국과 세계를 봉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장 이머우의 성공이 가져온 결과는 세계로 향하는 창이라기보다는 그 시야를 가리는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대국으로 굴기(     起)하는 중국이 아니라 서양이라는 타자에 의해 구성된 동방의 이미지이며, 서방 남성관객의 욕망의 시선에 영합한 동방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 카이거는 중국영화의 또 다른 거울이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대범함과 명석함은 <아이들의 왕(孩子王)>이 1987년 깐느영화제에서 고배를 든 후 사라졌고(같은 해 장 이머우는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거머쥐었다), 천신만고 끝에 1992년 <패왕별희>로 깐느영화제를 석권했지만 그것은 추락으로 얻은 구원이자 굴복과 맞바꾼 면류관이었다. 천 카이거가 고심해서 재현한 중국본토문화는 탈식민문화라는 콘텍스트 안에 내재화(internalization)된 서양문화의 시점(視點)과 절묘하게 결합됨으로써 소실되어버렸다.
<황토지>에서 함께 출발한 장 이머우와 천 카이거가,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전지구화의 지표인 ‘블록버스터’로 귀결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와 문화의 ‘큰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성실하거나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역사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이 책의 커다란 미덕은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를 부단히, 긴밀하게 오간다는 점이다. 섬세한 왕복운동 속에서 그녀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아내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5세대의 문화적 의미는 저자의 해석(interpretation)을 통해 풍부하고 두터워졌다. 문제는 문학원전에 빚진 영화에 대한 평가다. 물론 저자도 그 문제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 이머우와 천 카이거 등 ‘주연급’ 감독을 논할 때, 원전과 영화를 면밀하게 변별해 논하지 않고 모두 감독의 몫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모 옌(莫言)의 『붉은 수수밭』과 리 비화(李璧華)의 『패왕별희』 같은 두터운 원전이 없었어도 풍부한 해석이 가능했을까?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영화감독의 사회겧??인식이 과대평가되어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다이 진화 교수의 글을 친절한 역주와 함께 ‘그대로’ 옮기려 한 것은 번역본의 미덕이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번역본에서 사용된 ‘동일시’라는 용어는 ‘런통(認同)’의 역어인데, 동사적 용법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체성’으로 바꿔읽어야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문화적 동일시’는 ‘문화 정체성(cultural identity)’으로 번역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