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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멸해야만 사는 사회로부터의 회신, 『모멸감』
통권 : 45 / 년월 : 2014년 5,6월 / 조회수 : 2681
서평 김찬호 지음,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문학과지성사, 2014년 3월 발간)

익숙한, 모멸의 추억

 

몇 해 전 『피로사회』가 잠시 잊고 있던 친구들의 ‘피로’를 깨닫게 해 준 것처럼, 『모멸감』이라는 제목의 이 책 역시 누구에게나,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모멸감』은 사회과학, 문학, 회화 등의 분야와 함께 최근의 흐름을 다루는 기사와 같은 풍부한 예시로 구성되었다. 그렇기에 독자들이 모멸이라는 감정을 이루는 여러 겹의 층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장을 멈춤 없이 넘길 수 있는 까닭은, 이 ‘모멸감’이라는 감각의 경험이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의 회로는 아주 예전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기도 했고, 최근 몇 가지의 경험으로 흘러들기도 했다.

이 책은 '모멸감'이란 감정의 더께에 현 시대의 세밀한 결들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보여준다. ‘모멸감’이라는 감정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축약하는 다면적 얼굴이다. 저자는 사회문화 구조적으로 구성된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 사회를 통찰한다. 최근의 이른바 ‘포스코 라면 상무’ 사건, 상담원과 승무원 등 감정노동자들의 고통, 모멸감 때문에 끝내 비극으로 끝난 노르웨이 테러 등 여러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한다.

 

 

감정노동과 자본 환원주의

 

또 다시 내 기억은 몇 년 전, 한 대형 서점 캐셔(cashier)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에 얼마간 머물렀다. 주말이면 계산대 앞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줄을 선다. 빠른 손놀림으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 줄을 ‘처리’하고 있던 중, 한 중년 남성은 ‘책을 봉투에 넣어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봉투에 책을 넣어 준’ 나의 사소한 실수에 대해 엄청난 호통을 치면서, 줄이 바뀔 때까지 카운터 옆에서 분을 삭이질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자’의 당혹스러운 낯빛을 나는 숨길 수가 없었고 다른 손님들은 날 측은하게 바라봤다. 도무지 무엇이 그렇게까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바생 을’의 위치에서 “죄송합니다” 외에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못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바로 바꿔 드릴게요”라는 항변과 시정(?)의 말이 그 심기를 더 건드렸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결국 노련한 직원이 와서야 그는 자리를 떴다. 오래된 그 직원 언니는 말했다. “저런 손님 많아. 신경 쓰지 마.” 실제로 그녀들은 이런 일에 질릴 만큼 익숙해 보였고, 직접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역시 능숙히 ‘처리’하는 데 익숙했다. 내가 그 알바를 하던 내내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아, 나도 이곳의 손님이고 싶다!” 그들처럼 맘껏 점원을 부리겠다는 욕망의 발로는 아니었지만, 모멸감에 너무도 취약한 그곳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대체 타인으로부터 인격을 모독당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인격을 내보이는 데에 그토록 당당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한국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자로 ‘군림’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압축적 발전을 이룬 반면, 정신적·정서적 측면은 그만큼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불일치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가장 모진 수모를 당하는 직업이 서비스 감정노동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 감정노동자들은 소비자에게 마땅히 ‘대접’해 주어야 하는 직업이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중’을 드는(serve) 일종의 서비스 노예를 바라는 것이다. “카푸치노 나오셨습니다”라는 틀린 어법을 서비스 노동자들이 반복하는 이유는, 정말 한국어 어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를 많은 소비자‘님’들이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접받는 모든 것마다 존댓말이 붙어야 온전히 존중받고 시중 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 소비자가 “왕”이기에.

이는 소비자가 돈을 ‘내기’ 때문이지만, 단순히 그렇지만도 않다. 대부분의 감정서비스직은, 변호사나 의사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상위계층이라고 인식되는 서비스 직업이 아니다. 그렇기에 하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는 신분문화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이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그 노동자들보다 우월한 계급·계층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소비자들 역시 사회에서 이미 그러한 ‘취급’을 받아 왔기에, 역으로 이것을 타인에게 확대·재생산하고 있다고 봐야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저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삼성의 이건희 회장과 같은 ‘완전한 갑’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을’이며, 그러한 고난을 또 다른 ‘갑’으로부터 꾸준히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당하고 있거나, 당했을 것이다. “억압된 것은 회귀”하므로, 그 억눌린 심정은 자신이 하대할 수 있다고 여기는, 즉 돈을 냄으로써 그 ‘권리’를 획득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시 엉뚱하게 앙갚음된다. 성매매업소를 이용하는 남성들이 애인, 아내 등 정식 파트너에게는 요구할 수 없는 성행위를 성 판매 여성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지불한 돈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이 여성을, 그들의 아내(애인)와 다르지 않은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사고파는 하나의 상품으로 대해도 된다는.

돈이 이 시대의 슈퍼갑, 모든 것을 (불)가능케 하는 무기가 되었다고 반복하는 건 지겨운 이야기다. 결혼 시장은 자본들의 재조합과 교환 장터가 되었고, 취업은 사교육을 통해 다진 능력을 자본에게 평가받는 장이다. 학력과 학벌, 영어 점수와 등급, 자격증, 직업, 회사명, 직급, 연봉, 차종, 자가 및 유산 상속의 여부, (조)부모의 직업과 재력, 외모 등 총체적 평가를 통해, 개인은 비로소 한 ‘온전한(진정한) 개인’으로 재탄생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사랑받은 경험을 거의 획득해 보지 못한 이들이 벌이는 처절한 인정투쟁의 뒤틀린 형상이 인터넷 댓글창이며, 식당, 서점, 비행기 안일 것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 쓰고 보니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런 게 정말 존재하는 건가 문득 혼란스럽다. 내면을 지우고 ‘관리’하며, 서서히 그 내면을 가면으로 덧발라 온 것이 오늘날 우리네 자아형성의 과정이 아니었던가!

 

 

모멸하지 않으면 모멸 당하리

 

내가 인터넷 기사의 댓글을 자주 외면하는 이유는 내 담력을 시험에 들게 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기사마다 새겨진 시대의 우울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악플과 선플의 비율은 타 국가에 비해 극도로 높은, 4:1정도의 비율이라고 한다. 이 현상 앞에서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얼마나 깊이 병들어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타인을 뭉개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의 나라, 이곳이 바로 ‘차별할 자유’, 조롱하고 존엄을 짓밟을 자유가 보장된 디스토피아였다. 언어적 성폭행은 일상이며, 익명성은 큰 무기가 된다. 아이디와 이모티콘이 아닌 만질 수 있는 생생한 ‘얼굴’로 그들은 대체 어떠한 일상을 살고 있는가, 아니 파괴하고 있는가, 혹은 버티고 있는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문장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였지만, 한국사회 한복판에서 일렁이는 불안을 나는 이렇게 변주한다. “서로 모멸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그것은 모욕하지 않으면 당하리라는 경쟁적 모욕이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같지 않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때로 자존심을 구길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반면 자존심이 매우 높아 그것으로 타인을 공격하지만, 정작 타인의 자존심을 존중하지 못하는 이는 자존감이 낮을 확률이 높다. 그때의 자존심이란 자칫 건드리면 무너질 나를 지키는, 일종의 억센 방어벽인 셈이다.

한편, 과잉된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는 때로 개인의 자존감과 행동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태도는 전형적인 속물의 특징이다. 속물의 자기우월성은 타자 경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속물과 잉여』(백욱인 엮음, 2012, 지식공작소)에서 보고하는 한국의 급속한 속물화 역시 이 '모멸의 보편화'의 감정구조와 연결된다. 속물과 잉여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속물이 재산, 지위, 가족 등 배경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찾는다면, 잉여는 속물이 되고자 열망했지만 실패한, 유예된 속물이기 때문이다.

속물은 ‘내가 어떤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가’에 대한 잣대와 정당성이 자신의 외부에 있다는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내면이 아닌 외면 혹은 타인의 욕망에서 찾는다. 또한 ‘나’에 대해 확신이 없기에 스스로를 승인하지 못한다. 내세울 만한 내면의 소유물이 없기에 주변에 속한 것들을 끌어와야 스스로의 가치를 웅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모멸감에 취약할 뿐 아니라, 반대로 타인에게 너무도 쉽게 모멸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내면이 단단하지 않은 이들의 높은 자존심은 스스로 쌓은 연약한 모래성이다. 그들은 모욕이라는 그릇된 '권력'을 모래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타인에게 휘두르는 것이다. 하지만 모래성은 그뿐이다. 지금 무너지지 않으면 곧 무너질. 무엇보다 모멸감은 실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빚은 사회, 사회를 빚은 감정

그러한 모멸의 악순환을 끊는 저자의 제안 중 한 가지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invaluable), 즉 그러므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세계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돈, 지위, 명예, 가십으로 함부로 평가될 수 없는, 가치를 책정할 수 없는 ‘가치’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물론 ‘너 자신을 알라’ 못지않게 식상해졌다. ‘힐링’의 유행으로 자기위로에 골몰하고, 인문학의 바람은 이제 대기업에서도 불어온다. 그토록 찾아 헤맨 자존감과 자기긍정을 과연 그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찾을 수 있을까? 자기경멸과 타자를 모멸하지 않는 방법, 단단한 자존감의 회복은 안전한 관계와 우정과 환대가 만든 시공간에서 가능해진다. 그곳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사람들이 있고, 억지로 만들어낸 가면으로 날 ‘관리’할 필요가 없는 공간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사랑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증거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돈과 소비가 아니라, 관계가 그 자유를 만든다.

감정은 사회적이다. 우리는 스스로 탄생시킨 세계를 감당해야 한다. “모멸감에 취약한 심성에 대해 저마다 일정 부분씩 책임져야 한다(292쪽).” 누구든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에 대해, 모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또한 군림하거나 당하지 않고 다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그 소박한 바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모멸감』은 그 책임과 바람을 나눠 갖기에 대한 책이다.

 

이미지 제공_문학과지성사




#저자 약력

이영롱 87년 통영 생. 독립연구자. ‘신세대’의 노동경험에 대한 석사논문을 썼고 앞으로도 이론-삶의 접점을 찾는 공부를 해 나가려 한다. 존엄을 지키며 지속가능한 노동, 페미니즘, 일상의 민주주의와 권력 등이 관심사. thewindblows2@gmail.com
글쓴이 : 이영롱
작성일 : 201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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