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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탁환의 『뱅크』 : 은행의 두 얼굴과 선한 자본에의 희망
통권 : 39 / 년월 : 2013년 5,6월 / 조회수 : 2241

 잘 아는 사람 얘기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제 힘으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일찌감치 신혼 전셋집을 얻을 준비를 했다. 자기 예금을 담보로 대출해 주는 상품을 들어서 꼬박 1년을 부었다. 믿을 수 없는 게 은행이라, 중도에 서너 번 가서 대출이 되는지 물었고, 내년 2월 초에는 꼭 대출해 준다는 철썩 같은 확답을 들었다. 그런데 정작 2월 초가 되어서는 허탕을 쳤다.

 ‘이 상품은 열두 달을 다 부으시고 난 그 다음 달에 대출되는 상품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식을 올리고 두 주가 더 있어야 대출금이 나온단 말이었다. 더 염장을 지른 것은 다른 상품이 있는데 왜 그걸 들었냐는 말과 함께, 몇 번 확인하러 갔을 때 확인해 준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며 천연덕스럽게 발뺌하는 은행원의 뻔뻔한 얼굴 때문이었단다.

 결혼은 물론 미룰 수 없었다. 정해진 날짜에 했고, 계획대로 전세집도 구했다. 은행 대신 다른 곳에서 돈을 구해서 말이다.

 김탁환의『뱅크』를 보면 이와 비슷한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거대한 민족자본의 형성과 부딪힘이 격랑 속에서 어떻게 흘러가 어떤 결과를 맺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인천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어수선하고 암울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내용의 빛깔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익히 아는 것처럼 결국 나라가 뺏길 것이니 하는 일마다 막히고 켕기고 괴롭고, 그야말로 가시밭이다.

 이런 격동의 시기에 외세가 은행을 등에 업고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혜안을 지닌 세 명이 모인다. 이들은 각기 한양, 송도, 인천을 대표하는 상인의 우두머리다.

 “앉아서 당하지 말고 우리도 뭉쳐야지.”
 “조선을 집어삼킬 어마어마한 파도가 왜바람을 타고 밀려들 걸세. 멍하니 있다간 마냥 휩쓸려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
 “조선 팔도는 나중에 엮더라도 한양, 개성 그리고 인천 이렇게 셋이서 먼저 합심하자 이 말이지?”

 외세의 거대 자본을 막자는 이들 셋의 결의형제는 뜨거웠다. 이기적인 장삿속만을 따진 속 좁은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을 무너뜨린 것은 외세가 아니라 내부의 적이었다. 민족과 나라를 팔아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악랄한 권혁필의 흉계에 결의형제 셋 중 송도, 인천의 우두머리 행수가 죽는다. 권혁필은 조선이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당위성을 외면한 채 사리사욕을 위해 일본과 결탁하기까지 한다. 그야말로‘우리가 든든하면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테지만’, 안에서 흔들며 썩어가니 버틸 수가 없었다. 나라가 기울어 가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이전 전통 상인들의 갈등의 한복판에 다음 세대들의 욕망이 다채로운 빛을 띠며 부딪친다. 이욕의 이합집산이 판을 치는 약육강식의‘돈의 나라’에, 민족자본을 세우고자 온 몸을 던지는 장철호와 최인향,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과 복수심에 불타는 박진태의 대결을 펼친다. 이들의 대결은 전통 상인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송도로부터, 민족자본 발아기의 용광로이자 뱅크 스트리트가 있었던 인천을 거쳐, 대한제국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은행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한양까지 팽팽하게 이어지며 다양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낸다.

 인천 바다에 나타난 일본 군함과 어선의 대결, 인천에 발을 디딘 외세들의 호텔, 철도, 마약 그리고 은행. 이런 그들의 음험하고 집요한 침략의 모습 가운데 패퇴하고 좌절하고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장철호와 그를 비웃고 무릎 꿇게 하겠다는 박진태. 이들은 목표가 높았던 만큼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쓰라린 상처를 남겼고, 저만의 방식으로 각기 다른 자본의 모습과 조우했다. 어떤 이는‘자본의 악마성’에 사로잡혔고 어떤 이는‘선한 자본’에의 희망을 품었다.

 이들의 승부는 비단 그들만의 승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린 승부였고 또 우리가 나가야 할 바를 지향하는 승부였다. 탐욕스런 자본가와 의를 아는 자본가의 한 치의 양보 없는 결투는 마땅히 선한 자본을 꿈을 품은 장철호가 이겨야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장철호는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릎 꿇고 만다. 반면 탐욕스런 자본의 악마성과 결탁한 박진태는 벌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승승장구한다. 이들 대결의 중심에 은행이 있었다.

 

 

 은행은 신용이다. 약속을 지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약속이 자본이 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의 일방적인 강요라면 그건 신용이 아니라 억압이고 족쇄일 뿐이다. 진정한 신용은 마음을, 미래를, 인정하고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은행은 두 얼굴이다. 은행에게서 큰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패가망신하기도 한다.

 은행이 부족한 자를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미래를 기대하며 바라볼 때, 은행은 선한 얼굴을 띤다. 그들을 키우고 자라고 힘을 갖도록 도울 생각으로 신용을 지킬 때 은행이 의를 하는 선한 자본이 된다. 장철호가 보여준 모습이 그것이다.

 장철호는 매사에 자기 말을 지켰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고집스럽게 그렇게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지켰다. 그래서 그는 더 힘들게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송상 조통달 밑에 들어가 머슴살이로 평생을 보내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배가 폭파돼 모두가 죽은 줄로 알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조통달을 찾아가 머슴을 산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더욱 그는 조통달이 아버지 장훈의 밭을 알면서도 매입하고, 자신과 여동생을 거지처럼 떠돌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도 그와의 계약을 파기하지 않고 지킨다. 오히려 조통달의 손자이자 친구인 조명종이 그런 사실을 알리며 밭을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끝내 받지 않는다. 장철호는 한 마디로 선한 신용이 있는 자였다.

 하지만 은행의 부정적 신용은 사악한 얼굴을 띤다. 기업과 개인을 키울 목적이 아니라 파괴하고 잡아먹어 자신의 살집만 불릴 생각을 한다. 이전 시대의 상인 권혁필, 조통달도 그랬고, 새로운 자본에 눈을 뜬 박진태도 그랬다.

 권혁필이 송상 장훈의 문서를 훔쳐낸 것이나, 인천 행수 서상진의 내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궁지에 몰고 결국 암살한 것, 그리고 배를 폭파시켜 장철호를 궁지에 몰고, 일본 자본과 결탁하고, 급기야 경인선 기차에서 장철호를 암살하게 한 것까지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도무지 믿음이나 신용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 지배하고 두들기고 의심하고 죽이고 괴롭히기로 자신의 일생을 허비한다.

 조통달은 송상 장훈을 인정하면서도 시기했다. 그래서 장훈의 땅인 줄로 알면서도 권혁필에게서 그 땅을 산다. 그렇게 알면서도 장물을 취득하고, 천애고아가 된 장철호와 장현주를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린다. 그는 자기 잇속을 위해, 자기 욕망을 위해 송상을 송상답게 만든 그 신용을 저버린다. 겉으로는 신뢰할 만한 믿음의 송상이지만 그 속은 이기심으로 삐뚤어진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그가 권혁필에게 밀리게 되고 노름에 미친 자신의 아들에게 자본금을 훔쳐 달아나는 배신을 당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말이기까지 하다.

 박진태 역시 겉으로는 믿음을 주는 행동을 한다. 하지만 철저하게 자기 욕망과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 자신을 받아주고 키워준 인천 으뜸 행수 서상진을 배반해서 죽이고 친구인 장철호를 린치해 암살하는 데 앞장선다. 그런 그에게 장철호가 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화해를 요청하는 것에 그는 다시 한 번 좌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뱅크』에 은행의 선한 얼굴은 장철호 뿐이고, 그 나머지 대다수는 크고 작음이 다를 뿐 모두 나쁜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돈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은행이란 것이 원래 선한 얼굴이 없는 것이어서 그런 것일까?

 장철호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하는 것이 없다. 번번이 당하고 진다. 죽을 뻔 하기만 수차례다. 물론 그때마다 다시 돌아오기는 한다. 그리고 결국 장철호가 이기기는 한다. 하지만 그가 권혁필과 박진태와의 대결에서 이긴 것이 주인공이어서 그런 거라면 실망스럽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개화기의 정해진 역사의 수순을 따라야 했기에 장철호가 마지막까지도 기를 활짝 펴지 못한 거라고 한다면 마음이 암울해진단 말이다. 원래 선한 은행이란 것은 아무리 괴로워도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가 아니라, 억지로 이겨야만 하니까, 아니 억지로라도 이겼으면 좋겠으니까, 장철호를 그렇게 그려낸 거라면 슬프단 말이다.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이유가 이자놀이를 하고 이자를 못 내면 원금까지 꿀꺽 삼킬 요량으로, 살랑거리는 얼굴로 빌려주었다가 부릅뜬 눈으로 윽박질러 뺏어간다면 정말 슬프단 말이다. 『뱅크』에서 최인향이 아직은 어수룩한 장철호와 박진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진실일 것만 같아 괴롭고 암울하단 말이다.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한없이 단정한 악마, 은행의 맨얼굴을.”

 외국에 진출하는 은행은 어떤 속셈일까? 아마도 나쁜 계산이 먼저일 것이다. 그 나라 사람들을 잡아먹고 기업을 쓰러뜨리고 궁극적으로 그 나라까지 집어삼킬 요량일 것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자국 은행은 어떤 은행이어야 할까? 마땅히 선한 은행이어야 할 거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한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선한 자본에의 희망을 잃어 버렸다면, 그것이 개화기 뜨거운 용광로와 같던 인천에 스리슬쩍 발을 디디고 우리나라를 잠식해 버린 일본의 은행들의 못된 행태와 그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정말 우문은 이것이다. 은행이 더 이상 빨아먹을 것이 없고, 가져갈 것이 없게 될 정도로 나라가 말라비틀어지면 어떻게 할까? 결국 은행도 죽지 않을까? 숙주가 죽으면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은 기생충도 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생각해 보면 은행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안타까움에 앞서, 기생충만도 못한 은행들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김탁환의『뱅크』를 덮으며 드는 생각이다.

 

 아참, 시간을 내서 날씨 좋은 주말에 인천을 가보는 것도 괜찮을 거다. 바닷바람도 상쾌하다.『뱅크』를 펴들고 김탁환의 안내를 따라 옛 은행거리를 돌아다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천에선 옛 은행거리를 복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모두 복원하자니 좀 찜찜할 수도 있겠다. 전부 못된 일본 은행과 나쁜 은행들만 복원해야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민족자본을 모으고 선한 자본에 희망을 걸었던 자들의 자취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말이다. 문득, 은행이 두 얼굴이란 내 생각이 착각이 아닐지 의심스럽다. 원래 한 쪽 얼굴인데 자꾸 두 얼굴이라고 우긴 것은 아닐까? 에라, 잘 모르겠다.




#저자 약력
劉光洙 1969년 춘천 생.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작가. 장편소설 『진시황 프로젝트』, 『윤동주 프로젝트』, 『왕의 군대』 등.
ho1000@empal.com

#주석
이미지 제공_박석태
글쓴이 : 유광수
작성일 : 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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