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사상 최초,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 기회! 홈쇼핑의 쇼호스트들이 호들갑떨면서 하는 말이다. 모든 홈쇼핑 프로가 마찬가지다. 많이 팔기 위해 온갖 자극적인 말들을 남발한다. 한때는 가전제품, 화장품, 의류, 식료품 등이 홈쇼핑의 중심 상품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전집과 총서가 대박상품으로 홈쇼핑에 진입했다.
얼마 전 어떤 홈쇼핑에서는 ‘세계문학전집’ 파격 세일을 단행했다. 50% 할인에 전자책 단말기까지 사은품으로 내놓았다. 마침 그 방송을 보고 있었던 나도 구미가 당겼다. 반값이라니! 잠시 고민했다. 구매 버튼을 눌러, 말어. 이미 그 출판사의 전집 중 20% 정도는 갖고 있었다. 수업이나 기타 글쓰기를 위해 낱권으로 구매했던 것이다. 결국 책을 구매하지는 않았다. 나는 되물었다. 왜 그 전집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지식과 교양에 대한 갈망?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내 거실의 한 벽면에 그 책을 빼곡하게 꽂아 놓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던 것은 아닐까. 책이야 말로 그 어떤 인테리어 소품보다 훌륭한,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는 소품이라는 생각이 내 안에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 ‘속물 교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계문학전집을 팔았던 모 홈쇼핑의 교육문화팀장이야말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어 속물 교양과 지식(교양)의 과시욕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직장인들의 교양 쌓기를 위한 고전 읽기 붐과 대학입시와 논술을 준비하는 중고생들을 위해 저녁 시간대에 편성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전집 시장은 대학입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면서 대안 교과서와 새로운 문학전집을 내놓는 출판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적대적 공범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속물 교양과 ‘입신출세’를 위한 책읽기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속물 교양의 탄생』(이하 『속물』)에 그 해답이 마련되어 있다. 속물 교양은 식민지 조선에서 탄생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과 독자들에게 명작은 ‘좋은 책’이아니라 ‘유명한 책’에 가까웠다. 이때 유명한 책이란 곧 세계문학을 일컫는 말이었다. 세계문학은 ‘서구문명의 산물’과 같은 의미였다. 즉 세계문학은 ‘서구 문명국가의 문학’이었다. 근대 문학을 문명의 척도로 믿었던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식민지 조선 반도의 지식인들과 독자들이 세계문학을 탐닉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열등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세계문학=서구문명국가의 문학’을 자신의 서재로 끌어들임으로써 세계적인 교양과 지식을 쌓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셈이다. 더군다나 유명한 인사들이 즐겨 보았던 세계문학은 일본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이었다. 원전이 아니라 일본어로 된 문학이었다. 따라서 명작을 원전으로 읽는 것과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읽는 것의 차이는 지식(교양)의 위계구도나 다름없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명작을 탐닉했던 원인에는 지식(교양)의 과시욕과 함께 입신출세에 대한 욕망도 한몫했다. “양서는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표어가 거리에 나부낄 정도였다(『속물』, 23면). 중세 계급사회에서 입신양명이 사대부의 중요한 과제였다면, 형식적으로 계급이 사라진 근대 사회에서는 입신출세가 학문의 최종심급으로 여겨졌다. 물론 학문이 입신출세의 도구로 전락하자 지식의 유무나 학벌에 따른 새로운 계급적 불평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명작=지식(교양)=입신출세’의 삼각편대가 식민지 조선에서 공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학교 교육, 출판 자본, 미디어의 끈끈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담론의 영향이 컸다. 명작 읽기, 혹은 책읽기가 지식(교양)의 계발과 입신출세를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선전되었다. 그런 결과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는 출판자본과 미디어를 중심으로 ‘전집 출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명작을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던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땠을까. 『학교사로 읽는 일본근현대사』(이하 『학교』)를 통해 식민지 조선 학교의 제도와 교육 방법을 우회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의 근대식 교육은 초기에는 서구 열강을 모델로 삼았지만,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는 당연히 일본식 교육 제도를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교육 제도와 방법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 안에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이 『학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940년대 이전 일본 학교 교육의 핵심 중 하나는 “시험에 기초한 경쟁”이었다(『학교』, 213면). 이때의 경쟁이란 궁극적으로 국가의 교육 정책에 복무하며, 학벌을 좋게 만들어 훌륭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입신출세와 같은 말이었다. 결국 일본에서의 교육은 입신출세를 위한 도구였으며, 그 시스템을 받아들인 식민지 조선에서 명작 읽기는 학벌 강화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교육과 독서와 입신출세와 연동된 행위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명작을 읽어야 하며, 학교 교육을 변화시켜야 할까. 그 해답도 이미 역사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학예사의 『조선문고』는 책의 물신화와 속물 교양을 배척하려는 “서적의 해방을 통한 만인의 교양을” 위한 기획이었다(『속물』, 324면). 이때의 명작 읽기란 “나와 세계를 연결해 준다는 의미를 일깨우며,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의 공명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소통의 계기”를 마련하는 행위인 것이다(『속물』, 324면). 서울대 추천도서, 하버드대 추천도서 식의 수능 위주 독서가 더 이상 학교 독서 교육의 중심에 놓여서는 안 된다. 학교의 독서 교육은 “아이들이 느낀 것을 스스로 표현하는 교육”이자, “아이들다운 꿈과 상상의 세계를 무럭무럭 키워가는 것”으로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학교』, 67-68면).
교육과 독서는 지식(교양)의 축적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성공과 출세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교육과 독서는 지혜의 메신저이다. 교육과 독서는 우리 안에 감춰진 능력과 열망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며,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온기와 지혜를 나눌 수 있게 만드는 촉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