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의 시와 평론 부문에서 각각 등단한 이력을 가진 어느 선배와 나는 지금 술자리를 갖고 있다. 건너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선배의 한 지인이 선배를 알아보고 다가와 잠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돌아간다. 선배가 내게 대뜸 말한다. “저 사람 시인이야.” 그리곤 끊겼던 대화가 다시 이어지지만 나는 그 이전의 대화 주제로 쉽사리 옮겨가지 못한다. 조금 전 스쳐지나간, 아마도 오늘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거의 없을 저 사람에 대해 내가 알게 된 정보는 유일하다. 이를테면 그이의 이름도, 성격도 아닌 단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왜 하필 시인이라는 자질이 그를 아는 데 있어 가장 맨 앞자리에 와야만 했을까. 그 술자리에는 오랫동안 남몰래 시를 써오던 이 한 명이 동석해 있었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선배의 지인은 시인으로 호명되었고 내 친구는 호명되지 못했다.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 있다. 저자는 ‘예술가라 쓰지 않고 ‘예술인간’이라 썼다. 책을 읽어보면 양자의 차이가 결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예술가’(artist)가 아니라, ‘예술가’이기는커녕, ‘예술인간’(homo artis)을 옹호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격과 특권을 가진 전문적 직업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예술인간’은 “자격특수적이기보다 보편적이며, 특권적이기보다 특이하고, 직업적이기보다 자기수행적인 인간형상”으로, 그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누구나’의 주체성”으로 나타난다.
“출간 여부와 무관하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날부터 그 사람은 소설가로서 존재한다.”고 알베르 카뮈는 말한 적이 있다. 그 자체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 문장은 그러나 옹색한 ‘정신승리’의 차원에서 읽힐 위험성이 다분하다. 현실에 눈 감은 관념적인 해결책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의 신포도 에피소드처럼 말이다. 가령 지난 19일 서울 성북구의 어느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연극배우 김운하 씨에게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날부터 명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 사람은 연극인으로서 존재한다.”고 손쉽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가 있을까. 그렇지만 카뮈의 저 문장을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독해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예술인으로서의 (근거 없는 ‘자부심’이 아니라) 냉철한 객관적 ‘자의식’이 그 자신을 예술인으로 자리매김 시킨다는 카뮈의 문장은 오늘날 예술의 당연명제로 각인된, 그렇지만 상당히 미심쩍은 하나의 경향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예술의 오브제화/대상화’(48~51) 경향이 그것이다. 제도화된 주류예술 중심의 예술 생산양식 속에서 안타깝게도 작품은 그것을 만든 예술가에게서 소외되어(‘예술적 소외’) 마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영구불변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수용자들에게 감상 및 거래되며 소유되어 왔다. 그렇지만 예술은 여타의 노동행위와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예술의 수행화(performatization)’라 명명해볼 수 있는데 여기서 핵심은, 음악이나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이 그러한 것처럼, 예술작가의 생산물이 창작과정 밖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비(非)공연예술의 경우도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 차원에 주목한다면 개별 작가의 창작과정에서 그의 예술적 행위는 대상으로서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주체화의 ‘과정’에 방점이 찍히게 되고, 이는 예술작품의 ‘완성품으로서의 신화’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완성품으로서의 신화’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인식을 가리킨다. 흔히 미술관에 간다고 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곳에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완성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것을 은연중에 전제하게 되는데, 이때 관람객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반응은 그저 유일무이한 실물 앞에서 해당 작품에 대해 감탄과 경이로움을 표하는 것에 국한된다. 그 결과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감상자가 만날 때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결국 고결한 예술작품 그 자체다. 감상자는 그저 작품 앞에서 최대한의 예의와 공손함을 갖춰 그것을 축성(祝聖)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의 예술창작자가 창작 과정 중에 자신의 작품과 대면하면서 맞닥뜨렸을 ‘과정(過程)으로서의 작품’은 감상자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거나 가뭇없어진다. ‘과정’으로서의 작품 외에 ‘완결’ 혹은 ‘완성’으로서의 작품의 맥락만이 최종적으로 부각되고 마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혁명』에서 일상을 근본적인 혁명의 대상으로 보고 재조직하려고 시도한 라울 바네겜이 예술의 본령은 새로운 상황을 창조해내는(-ing) 창작행위에 있지 창조된(-ed) 작품에 있지 않았다고 본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그는 ‘작품을 만들면서 그것을 폐지하는 역설적 과제’에 몰두했다.
‘예술의 수행화’라는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공유해볼 만한 흥미로운 논제가 하나 있다. 한 명의 예술인간이 자신의 작품을 공중(公衆)에게 공개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긴 경우 남겨진 자들이 처하게 될 곤혹스런 상황, 즉 그것을 공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데, 그는 1924년 40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며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작품 일체를 태워 없애 달라”고 유언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카프카가 남긴 저 불후의 작품들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막스 브로트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갈릴 것이다. ‘작가는 죽을지언정 예술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며 작품 공개를 우호적으로 보는 입장이 그 하나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쪽에 해당될 것으로 보이지만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작가가 끝까지 숨기고 싶어 한 개인의 내밀한 흔적들을 공표해버릴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 우리는 역으로 물어볼 수 있다.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으나 살아생전 철저한 무명의 사진작가였던 비비안 마이어의 경우는 이와 관련하여 좀 더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녀의 경우는 아무래도 카프카의 경우처럼 의식적으로 발표를 금기시 했다기보다는 생활에 치어 그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거나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존재와 그녀의 작품들을 발굴한 다큐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의 감독 존 말루프가 비비안의 어마어마한 양의 미공개 필름 컷들을 입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비비안이 보관창고 비용을 체불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료들이 헐값에 경매에 부쳐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진들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큰 주목을 받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 비비안이 살아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어떠한 재정적 지원도 받지 못했고 또 노후에는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경제적으로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러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자료들을 모조리 압수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엄중한 사실 말이다. 비비안 마이어의 이야기를 ‘성공 스토리’의 또 하나의 변주 정도로 바라보려 하는 일련의 안이한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연유한다.
연극인 김운하 씨의 부고 소식을 접한 뒤 그때까지 써 둔 이 글의 초고를 미련 없이 지우고 다시 썼다. 기왕에 써 둔 글이 아무리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텍스트 안에 너무 갇혀있지 않은가 하는 심정적 이유 때문이었다. 김운하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쩔 수 없이 2011년의 최고은 씨를 떠올리게 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을 논하기에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예술인간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 약력
李鍾灒 1977년 춘천 생,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최근 글로 계란말이가 아니라 닭알구이다」,「<명량>, <해무>와 메시아주의: 이방인-신을 위하여」 등. leverty@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