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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를 기다리는 사회
통권 : 55 / 년월 : 2016년 1,2월 / 조회수 :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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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기다리는 사회

 

최진석

 

 

1.

 

장면 하나. 이 소년을 보라! 6세에 정보처리기능사 최연소 합격, 7세에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고입검정고시에 합격. 곧이어 대학에도 최연소로 합격하지만 중퇴한 후, 학점은행 제도를 통해 컴퓨터 공학 학사학위 취득. 그리고 역시 최연소로 과학기술대학원 천문우주과학과 석·박사 과정 입학. 하지만 화려한 이력으로 쌓아올린 천재소년의 이야기는 한창 절정을 맞이하기도 전에 검댕이 얼룩이 묻어버렸다. 저명한 외국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 표절 의혹이 제기되면서 철회되는 수모를 당하고, 언론과 사회의 뭇매를 맞은 것이다.

 

장면 둘. 유학생 출신의 한국 소녀가 수학분야에서 최상의 기량을 발휘하여 명문하버드와 스탠포드에 동시 합격. 학제상 두 대학을 모두 다닐 수 없으나, ‘천재소녀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두 학교는 교환 교육 프로그램을 특별히 설치해서 재학할 수 있는 특전을 베풀기로. 세계의 석학들이 앞 다퉈 그녀와 만나보길 원하고,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저커버그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만남을 요청... 그러나 며칠을 연이어 한국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된 한민족의 쾌거는 대입을 앞두고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던 소녀의 거짓말로 들통이 났고,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신상털기가 시작되자 소녀는 결국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두 장면 모두 채 1년이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사건들이다. 이 뉴스기사를 접한 후, 왕년에 있었던 유사한 사례들을 금세 떠올린 것은 나만이 아닐 듯하다. 한국사회는 잊을 만하면 곧잘 천재가 등장했다며 떠들썩하게 판을 벌여왔고, 불행하게도 그 천재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대부분 실망과 허탈, 냉소와 분노로 급전되는 스캔들이 되어 마감되었다. 일종의 천재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이런 사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해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하나의 증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등교육이 의무화되고 문맹자가 거의 사라진 오늘날에도 우리는 우리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선망과 열정을 간직한 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천재를 그러한 존재라고 할 때, 지금 우리는 천재를 기다리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2.

 

그저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면, 천재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존재일 것이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세 가지 직무를 수행하며 살고 있고,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며 실행하길 요구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많은 일을 하는 것과 천재는 다르다. 오랜 각고의 노력 없이도 어떤 능력을 몸에 익힐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천재에 대한 일반의 기준일 것이다. 사람들이 천재를 부러워하고 호기심 속에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여가 역으로 재능의 충만으로 빛을 발하는 역설 때문일 듯하다.

 

독창적 능력으로 천재를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근대적인 풍속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천재의 이미지 자체가 생긴 게 불과 200여년 정도 밖에 안 되었다는 뜻이다. 고대사회에서 천재는 일종의 무속인에 가까웠다. 우리는 수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흔히 천재를 떠올리지만, 고대에 천재의 역할은 신의 메시지를 듣고 전달하는 데 있었다. 무당이나 영매가 그러한 존재들로서, 평소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신이 보낸 사자와 접촉해서 천상의 계시를 들려주는 사람이 바로 천재였다. 예컨대 󰡔일리아드󰡕󰡔오딧세이아󰡕를 보면 첫 장면은 늘 신이 전해준 영감에 힘입어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게 되었노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와 같은 영감을 받은 자가 바로 천재요, 시인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천재는 실상 독창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독창적이면 큰일이었다.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제멋대로 이야기를 변조해 버리는 꼴이 되는 탓이다.

 

18세기에 오면 낭만주의 사조가 득세하게 되고,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천재의 형상이 나타난다. 예술작품을 만드는데, 남의 것을 전혀 참조하지 않고도 자기만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재능, 그것이 바로 근대의 예술가요, 우리가 아는 정의 그대로의 천재인 셈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독창성에 대해 상당히 그럴 듯한 언급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천재의 독창성이란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 단지 안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법칙을 새로 세워서 제시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예술작품들이 저마다 서로 다르고 독특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렇게 자기만의 법칙을 통해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천재란 세상의 이치에 일종의 절단을 일으켜 새로운 이어붙이기를 감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독창성은 익숙하고 낯익은 것을 깨뜨리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강제로라도 들이미는 힘에서 성립한다. 그 결과는 새로운 삶이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말이 좋아서 절단이지, 익숙한 세상살이에 낯설고 이질적인 무엇이 침투해 들어올 때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것을 감내할 수 있을까? 예술이야 워낙 일상생활과 먼 이야기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가족과 종교, 일상생활의 패턴을 번쩍 들었다 놓는’, 그런 사태를 우리는 정말 반길 수 있을까? 그건 혁명과 같은 게 아닐까? 만일 천재가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오지 못한다면, 그런 재능을 어디에 쓰겠는가? , 그런데 천재의 독창성에 관해 운운하다가 갑자기 혁명 이야기로 나간 것은 너무 과한 게 아니냐? 정말 그럴까.

 

 

3.

 

천재 소년이나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우리가 그것을 소년소녀 이야기로 치부하는 한, 과학이나 예술의 머나 먼사건으로 간주하는 한 그렇다. 하지만 각도를 조금 비틀어 보면, 사실 천재에 관한 한국사회의 신화는 항상 있어왔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가령 황우석 박사의 추문을 떠올려보라. 유전자공학이라는 첨단의 학문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달리는 과학자의 이야기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부정적인 것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가? 유엔이라는 세계정치를 대표하는 수장 자리에 한국인이 앉다니! 또는 매번 대선이 가까울 무렵 등장하는 정치의 신예 기수들은 어떤가? 새로운 정치질서를 예고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사라진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우리가 기다리던 천재의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천재는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었다는 식의 한담을 나누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천재를 기다리는 사회의 심리, 그 의식의 이면에 깔린 무의식적 욕망이다. 천재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알다시피 사회는 전체라는 구조를 이룬다. 한 사람의 재능이 아무리 풍부하고 강력해도 개인만의 힘으로 사회는 변화하기 어렵다. 그 사회가 부패하고 무능력하고 쇠퇴일로에 있을 때,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개혁과 재편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한두 개인의 힘으로 될 일은 아닌 것이다. 요컨대 절단과 독창성이 필요할 때 정말 애써 구해야 하는 것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쇄신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지 천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천재를 기다리며, 천재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모든 무질서와 패악을 바로잡아주길 바라온 게 아닐까. 정치나 외교, 학문, 예술, 일상의 전 부문에 걸쳐 해프닝처럼 벌어졌다 사라지는 천재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런 욕망을 거꾸로 되비쳐 주는 것이리라. 제발 천재가 등장해서 이 모든 잘못된 것을 올바로 세워달라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사회를 바로잡길 바라는 한, 천재를 기다리는 심리는 탓할 게 없다. 문제는 이러한 기다림의 이면이다. 거기엔 또 어떤 욕망이 있는가? 익숙하고 정체된 삶을 절단하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것, 그러한 독창성을 우리는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심지어 우리는 고양이가 계속 우리를 억압하고 감시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닐까? 변화를 외치면서도 실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싶어하는 내면의 보수주의, 천재들의 등장을 욕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룰 미래를 반기지 않는 역설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수많은 천재 소년소녀들의 몰락으로 나타난 우리 자신의 질병은 아닐까.

 

천재는 오래된 관념이고, 일종의 소문이다. 시민에 대한 공공교육이 불충분하고, 시민으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 실천이 부족할 때 유포되었던 신화이기도 하다. 분명 사회는 천재를 필요로 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천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다. 그 천재에게 기대하고 욕망하는 것들은 대개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거나 아직 하지 않고 있는 일들이기 십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천재가 나타나 우리 삶을 바꿔주길 바란다면, 지금부터 우리 자신의 팔을 걷어부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따지고 실천하는 게 더 빠른 일이 될 것이다. 천재를 기다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만이 진정 자신을 변혁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저자 약력
崔眞碩, 1974년 서울생. 문학평론가. 수유너머N 연구원.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와 󰡔해체와 파괴󰡕를 번역했고,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을 동료들과 함께 썼다. vizario@gmail.com.
글쓴이 : 최진석
작성일 :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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